“네가 그렇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다. 어려운 결심 해줘서 고맙다.”
서아가 생각하는 결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는 진심으로 그녀와 같이 가족을 이루어 살고 싶은 마음에 프러포즈를 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는 게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시작하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우혁은 미래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가짜 열애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혼이라고 하지만 나는 너랑 결혼하고 싶었는데 조금 시기를 앞당길 뿐이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서아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우혁을 밀어내고 돌아섰다. 코맹맹이 소리가 나지 않게 최대한 숨을 몰아쉬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 대표님한테 연락해야 하잖아요. 누구보다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은 장 대표님이니까요.”
“아, 그렇구나.”
우혁이 전화기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렸다. 서아는 전화 내용을 듣고 싶지 않아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서아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껍질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은 거북이처럼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우혁은 한 손에 전화기를 든 채 우두커니 서서 서아의 닫힌 방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뭔가 어긋나 버렸다. 지난밤 두 사람은 애초에 하나였던 것처럼 익숙하고 완벽하게 서로를 사랑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자 생판 남보다 더 어색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지난밤이 꿈인 것만 같았다. 정말 그가 서아를 안았던 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우혁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서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감각을 떠올려본다. 서아가 우혁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그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을 기억해 낸다. 그게 정말 일어났던 일인지 아니면 열망이 만들어낸 환상인지 혼란스럽다.
“서아야!”
우혁은 그렇게 서아의 이름을 읊조리며 그 자리를 지켰다. 얼마나 지키고 서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해가 눈을 찔렀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을 들어 시린 눈을 가렸다. 무음으로 바꿔 놓았던 핸드폰에 민석으로부터 전화가 대여섯 번 들어와 있었다.
“무음이라 못 들었다.”
우혁의 침울한 목소리에 민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아 씨 반응이 좋지 않아?
“아니, 결혼하겠대.”
-그래? 다행이구나.
민석의 목소리도 서아의 반응만큼이나 울적하게 들렸다.
“우리 결혼, 문제 있어도 많이 있는 모양이다.”
-왜 그런 말을 해. 너 서아 씨 사랑하잖아.
“그렇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거면 좋아해야 하잖아. 그런데 서아는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모양이다. 지금 울고 싶은 기분인가 봐. 그런데 나는 서아더러 그런 결혼하지 말자고 그냥 버티자고 말을 못 했어.”
-우혁아!
“나란 놈 진짜 비겁하고 이기적이다.”
-그런 말 하지 마. 너희 둘 열애설로 시작했지만 진짜 열애가 됐잖아. 결혼도 마찬가지일 거야.
“과연 그럴까? 모르겠다. 그냥 차현준이 그 자식을 찾아가서 밟아 버리고 싶어.”
-약아빠진 그 새끼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뒤에서 조종하고 있잖아. 네가 차현준이 건드리면 완전히 너만 이상한 놈 되는 거 알지?
민석이 불안한 마음을 감추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지금 욱한다고 차현준이한테 가겠어.”
-그래 다행이다. 마음 굳게 먹고 인터넷에는 절대 들어가지 마라.
“난리도 아니지?”
-삼일 만 참아. 삼일 참으면 관심 멀어져. 허위사실 유포로 김배우 고소하고 동영상 공유하거나 댓글 다는 사람들한테 계속 경고 댓글 달고 있어. 나는 앞으로 며칠은 집에 못 들어간다.
“고생이 많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서아 씨나 잘 챙겨라.
서아 씨나 잘 챙기라는 말에 우혁은 꽉 닫힌 방문을 흘끔거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멈칫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거실을 맴돌던 우혁은 갑자기 어이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이 바보야, 서아랑 결혼을 하자고 하면서 반지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잖아.”
우혁은 후다닥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서아 방문을 두드리자 대답이 없다.
“나 급하게 볼일이 생겨서 잠깐 나갔다 올게.”
대답이 없다. 잠시 손잡이를 잡고 고민했지만 지금은 서아를 혼자 두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결혼을 결정하는 이유가 뭐라도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안 되는 거였다. 서아는 이 결혼이 처음부터 끝까지 비즈니스라고 여길 거다.
차를 몰고 타운하우스 입구로 나가자 갑자기 경비가 달려와 우혁의 차창을 두드렸다. 가끔 보이는 익숙한 얼굴이라 우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나가지 않으시는 게 좋겠는데요.”
“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밖을 내다보았다. 한 무리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얼쩡거리고 있었다. 우혁은 미간을 찡그리고 엄지손톱을 이로 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뒤에서 빵빵하는 소리가 들려 백미러를 살펴보았다. 채영의 밴이 나가는 모양이었다. 우혁이 차를 돌려 밴의 뒤로 갔다. 우혁을 알아본 매니저가 갑자기 차를 돌리더니 출입문에서 보이지 않는 쪽으로 주차했다.
덩치 큰 매니저가 차에서 내려 천천히 우혁 쪽으로 다가왔다.
“기자들 때문에 못 나가시는 모양이네요.”
우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매니저가 씩 웃으며 차를 밴 쪽으로 대라는 시늉을 했다.
“채영 씨 때문에 너무 죄송해서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겠네요. 제 잠바랑 모자 쓰고 밴 끌고 나가실래요? 제가 강 배우님 차 타고 가서 JK401 주차장으로 가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어요?”
“채영 씨 어머님이 오셔서 같이 계시거든요. 그래서 저는 사무실로 가는 중이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우혁이 재킷을 벗어 차에 놓고 내렸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미소를 띤 매니저가 자신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주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냄새나더라도 여기 나갈 때까지만 입고 나가세요.”
“채영이가 좋은 사람을 곁에 두고 있네요. 고마워요.”
매니저는 과찬이시라며 어쩔 줄 몰랐다. 우혁의 차를 탄 매니저가 먼저 나가고 뒤따라 우혁이 밴을 끌고 나갔다. 기자들이 우혁의 차에 매달려 앞을 가로막는 사이 우혁은 밴을 타고 여유 있게 타운하우스 입구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