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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Nov 20. 2024

81. 인생 헛산 거야

서아가 베이컨과 양파를 볶아 팔 등분한 카망베르 치즈 위에 올려 오븐에 구워냈다. 꾸덕해진 치즈와 베이컨을 나초에 올려 채영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칼로리 높은 걸 먹으라고?”


채영이 말로는 칼로리 운운하면서 반짝거리는 눈은 나초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오늘 두 시간 달리고 근력 운동 한 시간 했으니까 한 번쯤은 괜찮을 거야? 그렇지?”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저는 여배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 동네 들어와서 능력치를 올린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맥주를 마시는데 안주 없이 어떻게 마셔요?”

“맞아. 맞아.”


채영은 치즈를 얹은 나초를 한입 베어 물더니 ‘우리 집 식탁을 부탁해’라는 프로에 나와서 보여줬던 리액션을 남발했다.


“대박. 이거 진짜, 완전 맛있는데. 만들기도 어렵지 않으면서 맛있어!”


채영이 발을 구르며 신이 난 듯 맥주를 들이켰다. 그런 채영을 보며 서아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프로필상으로 서아보다 세 살 더 많은 걸로 나와 있는 채영은 열여덟에 데뷔에서 벌써 데뷔 십 년 차다.       


데뷔할 때는 제법 젖살이 통통했던 그녀는 이십 대가 되면서 살이 빠지기 시작, 계속 외모 절정기를 갱신하며 여기까지 왔다. 손을 대기는 하지만 꾸준한 시술이지 크게 수술까지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쉽게 사랑에 빠지는 스타일로 상대 배우와 열애설이 자주 나지만 소문에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야말로 세상 사람들 시선에 상관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편이다.


“캭, 이 맛이다. 이걸 못 먹게 하다니 나쁜 매니저 같으니라고.”

“그냥 사다 먹어도 되잖아요.”

“그렇지. 사다 먹어도 되는데 나도 양심이 있어서 자숙한 거지.”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서아 씨 얼굴을 보니까 내가 다 술이 당기더라고. 무슨 일인지 몰라도 너무 쓸쓸해 보였어. 손에 프러포즈 링을 낀 사람 얼굴이 그러면 안 되잖아.”

“그럼 채영 씨는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채영이 히죽 웃더니 빠삭 소리가 나게 나초를 베어 물었다. 나초 위에 올린 치즈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아 길게 늘어지자 포크로 둘둘 말아먹느라 대답을 빨리 하지 못했다.


“그러게. 기회는 이때다 해야 하는데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 거 보니까 나도 이제 늙었나 봐.”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낸 그녀가 자기 잔을 먼저 채우고 나머지로 서아의 잔을 채웠다. 서아의 잔에는 아직 맥주가 남아 있었지만 채영은 맥주를 더 부어 채웠다.


“자기 술 잘 못 마시는구나.”


서아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아주 못 마시는 건 아닌데…….”

“그럼 마셔. 마시고 행복해지자고. 사실 그깟 남자보다는 얘가 훨씬 위로가 된다고. 서아 씨 그거 몰랐으면 인생 헛산 거야.”


술자리에서 본 채영은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런 매력이 사람을 스타로 만드는 거구나 싶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사람을 쉽게 무장해제 시키는 친근함에 정신이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우혁은 왜 채영을 그렇게 거부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서아는 채영이 프러포즈 반지와 결혼에 대해 물으면 대답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우혁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자숙하느라 술을 마시지 못하는 동안의 괴로움에 대해 토로할 뿐이었다.


“사실은 신작 드라마 들어가야 해서 관리차원이었어. 그런데 마침 자숙할 건이 있으니 회사 대표한테는 자숙이라고 했지.”

“드라마 찍는 거예요? 와 곧 바빠지겠네요?”

“응, 바쁘겠지. 그동안 많이 놀아서 바쁘고 싶었어. 감독이 나한테 상대 배우를 고르라고 하는데 차현준 어떨까?”


차현준이라는 말에 서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 마세요!”


서아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왜?”

“그냥 차현준은 아닌 것 같아요. 언니한테 안 어울려요.”

“그런가? 요즘 대세잖아. 걔가 동영상 사이트며 에스엔에스 관리를 잘해서 해외서도 대박인가 봐.”

“그래도 차현준 하고는 절대 같이하지 마세요.”


서아가 양손을 움켜쥔 채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뭐야? 뭔가 있는 모양인데.”

“몰라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하여튼 언니가 차현준하고는 엮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케이, 알았어. 차현준은 제외. 서아 씨가 나한테 언니라고 하니까 내 마음이 이 치즈처럼 말랑해져서 다 들어줘야 할 것 같잖아.”


채영이 포크로 치즈를 누르며 깔깔댔다. 하지만 그녀의 말과 다르게 치즈는 이미 많이 굳어 있어서 별로 말랑해 보이지 않았다. 서아는 자리에서 일어서 치즈를 제대로 말랑하게 만들어 주겠다며 주방으로 가져갔다. 


오븐을 돌려놓고 생각해 보니 자기가 어떻게 윤채영에게 언니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했는지 신기했다. 우혁에게 오빠라는 말은 참 어렵게 했는데 채영에게 언니라는 말은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왔다. 


오빠나 언니 같은 호칭을 편하게 사용하지 못했었는데 아무래도 이제 그게 그리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쉽게 친근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서아의 마음도 빨리 열리는 것 같았다.


은서아 인생에 제일 많은 술을 마셨다. 채영에게는 장난 수준이겠지만 서아는 오백 미리짜리 맥주 캔을 세 개나 마신 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술에 취해 채영의 집 침대에서 트램펄린을 타듯 뛰며 노래를 불렀다. 왜 갑자기 그 노래가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들국화의 행진을 불렀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 노래를 떠올리며 ‘행진, 행진하는 거야!’를 외쳤다.  


채영은 서랍에서 야광봉을 꺼내 서아의 손에 들려주었다. 서아는 야광봉을 흔들며 록 페스티벌에라도 온 것처럼 뛰다가 잠이 들었다. 그게 아마도 새벽녘이었을 것이다. 멀리서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잤다.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다. 사실은 머리가 너무 아파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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