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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Nov 18. 2024

80. 술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누군가 서아 옆을 바람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놀란 서아가 어깨를 흠칫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커다란 헤드폰을 귀에 꽂고 레깅스 차림으로 달리던 사람이 속도를 늦추지 못해 한참을 더 달려 나가서야 멈췄다. 


여자는 헤드폰을 내려서 목에다 걸고 어둑한 길모퉁이에 서 있는 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은서아 씨?”


서아는 채영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여기서 채영까지 그녀를 괴롭히면 정말이지 너무 힘들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차현준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완벽할 것만 같은 날이었는데 한 번 무너지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혁 오빠네 집에 들어와 산지 꽤 됐어도 밖에 잘 안 나오더니 어쩐 일이에요?”

“뭔가 좀 어색해서 잘 안 돌아다니 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오늘은 그냥 나와 보고 싶었어요.”


채영은 고개를 까딱이더니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는 게 아마도 꽤 오랜 시간 달리기를 한 모양이었다. 헤드폰을 귀에 댔다 다시 내리더니 결심이 선 듯 서아 곁으로 다가왔다. 


“프러포즈 반지 받은 모양이에요?”

“네?”


서아는 그제야 자신이 오늘 우혁에게 반지를 받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손을 들여다보았다. 반지를 받을 때만 해도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을 몰랐다. 서아는 채영에게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재빨리 손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들어가 봐야겠네요. 죄송합니다.”


서아가 몸을 돌리자 채영이 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나랑 한잔할래요? 서아 씨 얼굴 보니 한잔하고 싶은 표정인데.”


당황한 서아가 고개를 돌려 채영을 바라보았다. 채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부드러운 시선으로 서아를 바라보았다. 


“매니저가 술을 몽땅 치워버려서 우리 집에는 술이 없거든요. 한잔할 맘 있으면 집에서 술 챙겨 와요. 내가 서아 씨한테 밉상 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뭐 엄청 유감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채영이 손으로 자기 집을 가리키며 걸어 들어갔다. 서아는 멍한 얼굴로 채영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세상 혼자인 것만 같은 순간 엉뚱한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이건 뭐지 싶은 기분인데 나쁘지 않았다. 


차로 대문을 밀고 들어올 정도로 강렬하게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 보면 어린애처럼 솔직한 사람이기도 했다. 채영이 지금 서아에게 해코지를 하고 싶은 마음에 부르는 것은 아니라는 게 확실해 보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간 서아는 주방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술은 많았다. 안줏거리도 제법 있었다. 혼자 여기서 위층의 우혁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것보다는 술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사람을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쇼핑 캐리어에 맥주를 번들로 집어넣었다. 술도 별로 마시지 못하면서 혹시 부족할까 봐 삼백팔십 미리 캔 대신 오백 미리 캔으로 챙겼다. 맥주 안주로 나초와 치즈, 베이컨 따위를 챙겨서 나서려는데 낯선 번호로 문자가 들어왔다.


<술 마시러 오려거든 최소한 맥주 번들 두 개는 가져와야 함>


채영이 그녀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아는 도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맥주 번들 하나를 더 꺼내 캐리어에 담았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어차피 우혁 오빠는 오늘 방 밖으로 코빼기도 내보이지 않을 모양이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술을 챙겨 나갔지만 막상 채영의 집 앞에서 머뭇거려졌다. 맥주가 잔뜩 든 쇼핑 캐리어를 이리저리 밀며 망설이고 있는데 문이 철커덩 열렸다.


“이봐요. 서아 씨, 그러고 있으면 술이 미지근해지잖아.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해요!”


인터폰으로 들리는 채영의 성화에 엉겁결에 집 안으로 발을 디뎌놓았다. 채영의 집 마당은 우혁의 집과 비슷하지만 제대로 꾸며놓지 않아 썰렁해 보였다. 씻었는지 젖은 머리에 실내복을 입은 채영이 현관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내가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서 와요.”


 여배우의 집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거실에는 윤채영의 사진 두 개가 걸려 있을 뿐 다른 장식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흰색 소파와 텔레비전 한 대뿐인 거실은 미니멀하다기보다는 좀 삭막해 보였다.


“집이 좀 썰렁하지요? 내가 뭔가 지저분하게 나와 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래요. 술상은 여기다 폅시다. 우리 집이 우혁 오빠 집보다 좋은 점은 딱 하나 이거예요.”


채영을 따라 주방 뒤쪽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자 서울의 야경이 보이는 발코니가 있었다. 통창을 달아 유리온실처럼 만들어 놓은 발코니에는 잎이 푸른 식물들이 한가득이었다. 그 사이에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사이좋게 마주 보고 있다.


“여기가 바로 우리 집 핫플레이스 아니겠어요.”

“와, 정말 좋네요. 우리 집에는 왜 이런 공간이 없지요?”

“이거는 우리 엄마 취향이거든요. 내가 집 안에 아무것도 못 놓게 하니까 여기다 발코니를 만들어 엄마 취향을 실현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공간을 제일 좋아한다는.”


채영이 벽에 걸려 있는 선반에서 맥주잔을 꺼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어머님 하고 같이 사세요?”

“아니요. 엄마는 다른 집에 사는데 여기서 반은 살다시피 하시지요. 내가 비밀번호까지 바꾸고 못 오게 하지만 뭐 우리 엄마도 나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서요.”


채영이 잔을 테이블에 탁탁 치며 빨리 술을 꺼내라는 눈치를 주었다. 서아는 서둘러 캐리어에서 맥주 번들 두 개를 꺼내 놓았다. 채영은 술을 보더니 히죽 웃으며 극락조 화분 옆에 있는 레트로한 스타일의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술이 미지근해지면 안 되니까 여기다 보관해 놓고 마시자고요.”

“술을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


채영은 맥주 캔을 따며 세상 신기한 표정으로 서아를 바라보았다.


“술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술은 원래 다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술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네? 하하.”


서아는 채영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어 버벅거렸다. 저토록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나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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