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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Nov 13. 2024

79. 묵직한 공기

평일이었지만 좋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더군다나 달콤한 너의 맛 촬영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다. 촬영이 끝나고도 서아와 우혁이 떠나지 않자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머물러 있던 참이었다. 


거기에 차현준까지 가세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잘못하면 일이 커지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서아는 우혁의 움켜쥔 주먹을 보고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주먹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경음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민석이 차창을 내려놓은 채 경음기를 울리고 있었다. 


우혁은 숨을 한 번 몰아쉬더니 얼굴을 펴고 차현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안, 바빠서 나는 먼저 가봐야겠다.”


우혁과 서아가 민석의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본 차현준이 카메라를 매니저에게 넘겨주고 재빨리 달려왔다. 민석은 그런 차현준을 못 본 체하며 시동을 걸었지만 한발 늦었다. 그대로 갔다가는 차현준이 다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차창을 내린 민석이 주변을 둘러보고 쏘아붙였다.


“뭐 하는 짓입니까?”


차현준은 숨을 몰아쉬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헐떡였다. 겨우 숨을 고른 차현준이 뒷좌석 차장을 두드렸다. 창문을 내린 우혁이 피곤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만해라. 너랑 놀아주는데도 한계가 있다. 옛날 일은 잊어버렸으니 너도 그렇게 알아라.”


우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정면을 보면서 말했다. 옛날 일이라는 말에 차현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잠시 평정심을 잃는 듯 보이던 그가 흠흠 거리며 가래침 삼키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다시 특유의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안 잊어버렸는데 선배님은 잊어버리셨구나. 어쩌지요? 저는 선배님이 저한테 사과할 때까지 계속할 건데.”

“내가 무슨 사과를 해야 하는 건데?”


우혁은 언성을 높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개인 사생활을 함부로 침해한 것에 대해 사과하셔야지요. 아주 찐하게.”

“닥쳐라. 그래봤자 소용없는 짓 하는 거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거든요.”

“너 진짜 구제불능이구나?”


우혁이 어이없다는 듯 몸을 뒤로 젖히며 쏘아붙였다.


“딩동댕! 맞습니다. 선배님은 구제불능 똘아이한테 제대로 걸리셨습니다. 그날 그냥 지나가셨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왜 끼어들어서 곤란을 겪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더 감춰야 할 게 많으신 분께서 말입니다.”


차현준은 그러면서 씩 웃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선수 입장하면 초이스 해야겠지요?”


보다 못한 서아가 고개를 휙 돌려 차현준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말을 하려는 순간 민석이 차를 출발시키는 바람에 서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차현준은 떠나는 차를 향해 세상 다정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누가 봐도 존경과 사랑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서아는 그런 차현준의 모습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대박이다.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냐. 저걸 어쩌지요?”

“우리가 상대를 안 하니까 저 자식이 더 기가 살아서 나대는데 어떤 식으로든지 대응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서아와 민석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혁은 팔짱을 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민석과 서아 둘 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우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선수 입장하면 초이스 해야겠지요?’


차현준이 빈정거리며 한 말을 민석도 서아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혁도 알아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귀에 와서 정확하게 꽂히는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듣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차현준이 감춰야 할 게 많으신 분이라고 한 건 가짜 열애설이 아닌 모양이었다. 우혁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걸 겨우 진정시키느라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걸 두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입을 다문 채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호스트 빠에서 호스트를 선수라고 칭한다. 그리고 호스트가 룸에 들어가면 여자 손님들은 자기 옆에 앉힐 호스트를 고르는데 그걸 초이스라고 한다. 차현준은 우혁에게 대놓고 네가 과거에 호스트 노릇을 한 걸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자 우혁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짤막하게 말했다.


“장 대표,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안 되겠다. 그냥 집에 가면 안 될까?”


민석은 두 번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들을 내려준 민석은 바쁘다며 사무실로 갔고 우혁은 입을 꾹 다문 채 동굴로 들어가듯 제방으로 가버렸다. 


서아는 열두 시가 넘은 신데렐라가 된 듯 황망한 기분이 들었다. 화려했던 드레스는 재투성이 옷이 되었고 멋들어졌던 마차는 호박으로 변해버렸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차현준이 시비를 걸어온 게 불쾌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우혁이 저렇게까지 불안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서아는 저녁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려다 차마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되돌아섰다. 닫힌 방문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오늘은 우혁을 혼자 있게 놔둬야 할 것 같았다. 이런 날은 시골로 떠나버린 친구 세진이 보고 싶었다. 


카페 마루에 가서 세진과 마주 앉아 캐머마일 차를 마시며 촬영이 끝나면 몰려오는 이 기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진은 서아가 우혁의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에 계신 어머니 댁으로 들어갔다. 


가끔 보내주는 사진 속에 세진은 목에 수건을 두르고 트랙터를 끌고 다니는 농부가 되어 있었다. 이제 세진이 알려주었던 목성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진 서아가 터덜터덜 집 밖으로 나갔다.


특별히 어딜 가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냥 집안에 있기 어려운 마음이 들었다. 문이 닫힌 우혁의 방에서 뿜어져 나온 묵직한 공기가 집안 전체를 찍어 누르는 것만 같아 견디기 힘들었다. 두툼한 카디건을 걸쳤지만 밤공기는 차가웠다. 


서아가 나오자 옆집 진돗개가 컹컹 거리며 짖어댄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그 녀석은 서아와 안면을 트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서아는 이 동네에서는 개마저도 텃세를 부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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