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동에는 고운 이름이 붙은 골목길이 많아요. 감고당길, 별궁길, 화개길, 복정길…….”
서아가 앞장서서 걸으며 우혁을 돌아보았다. 우혁은 붉게 물든 담쟁이가 촘촘하게 덮인 벽 앞에 서서 신기한 듯 그림을 바라보았다.
“보기 좋지요?”
서아가 다가와 우혁의 팔을 잡고 벽화 앞에 섰다. 안경을 쓴 백발의 할아버지와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입을 맞추고 있는 그림이었다.
입술을 쭉 내밀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서아가 따라서 입을 내밀었다. 우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쪽 소리가 나게 뽀뽀했다. 서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웃었다.
쾌청한 코발트블루색 하늘은 남태평양의 바다를 보는 것처럼 맑았다. 기상 캐스터는 올해 들어 가시거리가 가장 멀고 좋은 날이라며 주말이 아닌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점심시간에라도 나가서 하늘을 보시라고 권해주었다.
두 사람의 데이트 촬영이 있는 날 이렇게 좋은 날씨라니 날짜를 잡은 구 작가는 어깨에 뽕을 단 것처럼 으스댔다. 데이트 장소는 서아가 정했다. 그녀가 지치고 힘들 때면 종종 걷던 삼청동 길을 이번에는 우혁과 같이 걷고 싶었다.
마치 그녀의 보물을 우혁에게 소개해주는 기분이었다. 우혁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다고 했을 때는 좋아서 눈이 반짝거렸다. 미리 설레발을 쳐놓으면 실망할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참느라 혼났다.
“여기가 감고당길이라고?”
“아기자기하고 예쁘지요?”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자꾸만 생각나게 생긴 게 딱 우리 서이처럼 예쁘네.”
“그거 칭찬인 거지?”
“그럼 당연하지.”
우혁이 서아의 코에 자신의 코를 대고 살짝 비비며 대답했다. 구 작가는 스킨십이 너무 잦다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우혁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서아는 우혁의 손을 잡고 자신이 아는 것들을 소개하느라 말이 많아졌다.
외국인들도 줄 서서 먹는다는 떡볶이집과 입소문이 자자한 라면집 등을 가리키며 화개길을 거쳐 카페 거리로 들어섰다.
“아, 여기가 삼청동 카페거리구나. 전에 들어본 것 같다.”
한옥을 모티브로 한 카페, 비탈진 길에 있는 루프톱 카페와 프랜차이즈 카페 등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배가 출출해졌다.
“오빠, 이쯤에서 한 번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지 않아?”
“어떤 식당이야?”
우혁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서아가 방금 지나친 건물에 있는 식당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김치말이 국수를 먹어야 이 길을 지나갔다고 할 수 있지.”
“카페 거리에서 카페는 안 가고?”
“카페는 복정길 지나서 기가 막히게 예쁜 전통찻집이 있어.”
“우리 서아, 준비 많이 했구나!”
우혁은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난 오빠가 내 머리 쓰다듬는 게 제일 싫어.”
서아가 입술을 뿌루퉁하게 내밀며 말했다.
“왜?”
“그럼 오빠가 진짜 친오빠가 된 것 같아. 내가 오빠 막냇동생쯤 되는 기분이야. 나 그렇게 어린애 아닌데.”
우혁이 재미있다는 듯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큭큭 웃더니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제는 너 어린애 취급 안 할게. 미안, 미안!”
식당 안에 들어가자 젊은 남자 주인이 환한 얼굴로 서아의 이름을 부르며 반겼다. 우혁은 뭔가 기분이 나쁜지 서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사람이 네 이름을 어떻게 알고 저렇게 반겨?”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그럼 몰라? 전에 한 번씩 볼 때는 얼굴만 알았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이름을 아는 거지. 온 국민이 이름 다 아는 강 배우님이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
우혁은 그제야 이해하고 머쓱해졌다. 기가 죽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남자는 바보가 되는 거라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서아가 재미있는지 눈이 반달처럼 휘게 웃어주었다.
“사장님, 여기 김치말이국수 하나랑 김치볶음밥, 떡갈비 하나 주세요.”
“우와 맛있겠다.”
우혁이 기대에 차서 두리번거리자 서아가 눈을 지그시 감고 김치말이 국수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다.
“북한 음식인데 살얼음 동동 뜬 물김치에 소면을 담고 김, 달걀 고명을 얹어 참기름을 둘러먹는 거거든. 시원하고 칼칼한 것이 언제 먹어도…….”
서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를 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두 사람 앞에 김치말이국수 그릇이 딱 소리를 내며 서빙됐다. 두 사람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라고 생각하고 시켰지만 우혁이 국수를 많이 먹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바람에 결국 한 그릇 더 시켜 먹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삼청 공원을 걸었고 복정길을 지나 서아가 비장의 무기라고 숨겨 두었던 전통찻집으로 들어갔다.
건물 한가운데 네모난 마당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둘레로 꽃을 심어 놓았다. 지붕을 덮지 않은 마당에는 햇살이 쏟아져 마치 숲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툇마루 다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 연못에서 졸졸거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완전히 딴 세상 같다.”
“오빠랑 같이 여길 오게 돼서 좋다. 나 항상 혼자 왔었거든. 내가 여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
우혁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서아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앞으로는 좋은 날도 힘든 날도 네 곁에 내가 항상 있었으면 좋겠다.”
서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우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머니에서 반지 상자를 꺼내 놓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랑 결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은서아 나랑 결혼해 줄래?”
너무 갑작스러운 우혁의 말에 당황한 서아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갑자기 이게 뭔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제작진을 향해 물어볼 수 없으니 그저 놀란 표정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 어떻게?”
“불꽃 터트리고 피아노를 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요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그저 내 진심을 너에게 전하고 싶을 뿐이야. 서아야 우리 결혼하자.”
서아는 그제야 우혁이 열심히 서아의 반지 사이즈를 쟀던 이유를 이해하고 살포시 웃었다. 두 사람이 가짜 연인이라는 소문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지금 너무 요란하게 프러포즈를 하면 도리어 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