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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Nov 22. 2024

82. 예민하고 연약한

서아가 전화를 받지 않자 핸드폰이 반복해서 울렸다. 어디선가 채영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좀 해라. 시끄러워 죽겠다. 아, 몰라. 우리 집에 있으니까 와서 데려가. 자꾸 전화하지 말고.”


아련하게 들리는 채영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서아는 실눈을 떴다 다시 잠이 들었다. 


“어이, 술꾼 일어나 보시지. 해장하셔야지요. 열두 시가 다됐습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서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눈을 떴다. 누군가 암막 커튼을 걷어 치자 밝은 햇살이 침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서아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끄응 소리를 연달아 내뱉었다. 


“머리가 흔들려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이거 먹고 숨 좀 돌리면 해장국 먹자.”


우혁이 차가운 음료와 알약을 건네주었다. 서아는 우혁이 주는 대로 받아먹고 멍한 눈길로 앞을 바라보았다. 침대 밑에는 그녀가 벗어던진 카디건과 청바지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이었다. 위에는 티셔츠 차림이었지만 밑에는 속옷만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굴이 벌개 진 서아가 손가락으로 바지를 가리켰다. 우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카디건과 청바지를 집어 침대에 올려놓았다.


“이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해. 우리 서아는 절대 이런 애가 아닌데 저거, 저거 윤채영이가 애를 아주 버려놨네.”


우혁이 방 밖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걸 보고 서아가 당황해서 그의 팔을 잡았다.


“언니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뭐? 언니? 너네 둘 지난밤에 그렇게 된 거야?”


서아가 우혁의 팔을 잡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우혁은 무슨 큰일이라도 난 사람처럼 씩씩댔다. 


“너, 나한테 오빠라는 소리 한 번 해주기가 그렇게 어렵더니 채영이한테는 술 한 번 마시자마자 언니라는 말이 나오냐? 그렇구나! 나하고는 술을 안 마셔서 오빠 소리를 안 해준 거구나. 은서아는 술을 마셔야 되는 사람이었구나.” 


서아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우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채영 언니는 어디 갔어?”

“운동 갔어. 어제 너무 많이 먹었으니 오늘은 좀 달려줘야 한다며 나한테 너를 맡기고 갔어.”

“얼른 우리 집 가야 하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어.”

“쯧쯧. 잘한다. 남의 집에서 술 마시고 외박이나 하고 말이야.”

“내가 외박을 하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었으면서.”


서아는 우혁에게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아니야. 됐어.”


서아는 일어나 보려고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리려다 갑자기 머리가 너무 흔들려서 다시 누웠다. 그런 서아를 보더니 우혁이 한숨을 쉬고 등을 가져다 댔다.


“업혀.”


몸을 옆으로 누이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던 서아가 놀라서 고개를 옆으로 들어 우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야? 누가 업히라고?”

“누구긴 누구야. 너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는 빨리 집에 가는 게 낫잖아. 남의 집이 편하냐? 집에 가야 머리도 나을 거야. 그러니까 가자고.”

“싫어.”


서아가 눈을 질끈 감자 우혁이 다시 등을 대며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업혀라. 안 그럼 지난번처럼 들쳐 매고 가는 수가 있다.”


서아는 누운 채로 눈만 돌려서 우혁을 살폈다. 어제 방으로 들어가던 우혁은 다시는 방밖으로 나오지 않을 사람처럼 우울해 보이더니 오늘은 그럭저럭 회복한 모양이었다. 


“어제는 미안했다. 차현준이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미처 너를 챙기지 못했어.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등을 대고 앉은 우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서아는 누운 채로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엎드렸다.


“아침에 내려왔는데 네가 없어서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몰라. 네가 어딘가로 떠나버린 것만 같아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어.”


우혁이 준 숙취해소제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흔들리던 머리가 점차 진정이 되고 울렁거리던 속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우혁이 내밀고 있는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아의 가슴이 우혁의 등에 닫자 우혁이 손을 돌려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며 일어섰다. 우혁은 가볍게 일어서며 손을 그녀의 허벅지 아래쪽으로 받쳐서 업었다.


“우리 서아 시집갈 때가 돼서 그런가 묵직한데.”


서아가 팔꿈치로 그런 말을 하는 우혁을 등을 쿡 찍었다.


“아얏!”

“앞으로 그렇게 혼자 올라가 버리지 마. 오빠가 올라가 버리니까 갑자기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단 말이야.”

“미안하다. 내가 이기적으로 살아와서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부족해.”

“어쩌다 내가 이렇게 피곤한 스타들을 상대하며 살 게 된 건지 모르겠네. 강우혁한테 상처받아서 윤채영이랑 술을 마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야.”

“피곤해?”

“그럼 많이 피곤하지. 스타들은 너무 예민하고 연약해.”

“그렇구나…….”


서아는 말끝을 흐리는 우혁의 뺨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사람들은 그 예민함과 연약함에서 나오는 매력을 사랑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어. 강한 내가 보살펴 줄게.”

“훗.”


우혁이 웃으며 서아의 다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서아를 보살피겠다며 데려왔는데 막상 곁에 두고 보니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머릿속에 저장해 뒀다. 나 보살펴 준다고 했던 말 꼭 지켜야 한다.”


서아는 대답대신 우혁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우혁은 최대한 천천히 걷기로 작정한 듯 내리막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빨리 대답하라고 채근했다. 이웃집 리트리버는 두 사람을 보자 또 시끄럽게 짖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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