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영 배우님, 올해 연기상 휩쓸 준비되셨나요? JK401>
커피차에 달린 문구를 보고 채영이 피식 웃었다. 커피와 쿠키가 준비된 커피차를 받고 대본 리딩을 하러 나온 제작진들이 활짝 웃었다.
“어머, 우리 드라마 커피차 일 호를 채영 씨가 시작했네. 역시 채영 씨야. 잘 마실게.”
여기저기서 인사를 받으며 허리를 숙인 채영이 상대 배우인 서강민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서아가 차현준을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다. 제작진에서는 이미 남자 주인공에 서강민을 섭외해 놓은 상황이었다.
‘칫, 나한테 남주 고르라고 하더니. 다 정해놓고…….’
마음속으로는 ‘치사’ 소리가 나왔지만 눈은 생글생글 웃으며 강민을 향했다. 차현준만큼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기대주로 손꼽히는 서강민이다. 나이는 채영과 동갑으로 아직 열애설 한 번 나본 적 없는 풋풋한 느낌의 남자다.
“선배님, 잘 마시겠습니다.”
강민이 방금 이를 닦고 난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목소리로 인사한다.
“어머, 선배는 무슨. 그냥 친구 하자. 우리 동갑이잖아.”
“그래도 될까요?”
강민이 머리에 손을 얹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앞으로 사랑할 사이인데 편하게 지내야지 감정 이입이 더 잘 되겠지?”
“하하, 그런가?”
사람들이 계속해서 몰려오자 강민이 재빨리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몬드 쿠키 하나를 받아서 자리를 떴다. 채영도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익숙한 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웃었다.
“그러잖아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미리 연락도 없이 웬일로 커피차?”
차에서 깔끔한 슈트 차림의 민석이 내렸다. 베스트까지 갖춰 입은 더블 정장에 안정감 있는 스트라이프 타이까지 맨 민석은 연예인들 틈에서도 기죽지 않을 분위기였다.
“와우, 오빠가 연예인 같아. 오늘 리딩 하러 온 연예인들이 죄다 자다 나온 것처럼 하고 왔는데 정작 기획사 사장님은 장난 아닌데.”
채영의 칭찬을 무심한 듯 들어 넘긴 민석이 커피를 들고 가는 강민의 뒷모습을 흘끔 바라보았다.
“서아 씨하고 술 마셨다며?”
“응, 술만 마신 게 아니고 안주도 먹고 친구도 먹었어.”
민석이 알다가도 모를 게 여자 마음이라는 듯 묘한 눈길로 채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마음으로?”
채영이 손에 든 커피 잔을 들어 민석의 눈앞에 흔들며 말했다.
“이런 거 얻어먹을 마음으로.”
민석이 주먹 쥔 손을 입에 대고 흠흠 거렸다.
“그거 하고 커피차 하고는 아무 상관없어. 이건 그냥 응원 차원이야.”
“그래? 내가 앞으로 우혁 오빠 괴롭히지 않을 것 같으니까 고마워서 보낸 줄 알았는데.”
“야! 사람 너무 치사하게 만들지 마라.”
민석의 벌게진 얼굴을 보고 채영이 깔깔대며 웃었다.
“순진하기는. 연예인 찜 쪄먹어야 하는 기획사 사장님이 이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일을 하겠습니까?”
“하, 나 참.”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민석이 은근한 눈길로 채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정리한 거야?”
채영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멀리 보이는 강민을 향해 턱짓했다.
“새 작품 시작했으니 마음에도 새사람을 담아야지. 언제까지 나 싫다는 사람 괴롭히겠어. 내가 좋아할 때는 열렬히 좋아하지만 질척거리는 사람은 아니거든.”
“아하, 서강민이 맞는구나.”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넘겨짚지는 마.”
“저런 순둥이 애송이는 뭐 네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불타오르겠는데.”
“그러니까 살살해야지. 드라마 속도에 맞춰서 나가야지 너무 일찍 나가면 감정 조절이 어려워요.”
민석은 그런 채영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역시 윤채영이네.”
“그런데 민석 오빠.”
채영이 커피 잔을 흔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나도 그만뒀으니 오빠도 이제 마음 정리해. 결혼한다는데 계속 그런 눈길로 사람 보고 있는 거 하지 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채영의 말을 듣고 있던 민석이 놀라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자식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니거든. 우혁 오빠한테 눈치 없이 군 건 알지만 얄미워서 그런 거고.”
민석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감정을 흘렸으면 채영이 눈치챘을까? 그럼 우혁이나 서아도 아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온몸이 화끈거렸다.
“걱정하지 마. 두 사람은 서로 보기 바빠서 오빠 마음 모르는 눈치야.”
“정말 그럴까?”
민석이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동병 뭐더라 그런 게 있으니까 쉽게 알아본 거지.”
“동병상련,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가엽게 여긴다 그런 뜻이야.”
“알아. 알아. 잘난 척은 하여간. 그러니까 여태껏 연애도 못하고 짝사랑만 하지.”
“야, 윤채영!”
채영이 뒤로 물러나면서 혀를 쏙 내밀었다. 건물 안에서 채영의 이름을 부르는 조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 들어가 봐야겠다. 드레스 결정할 때 나도 따라갈 거니까 날짜 잡히면 알려줘. 혹시 모를까 봐 하는
말인데. 서아 부케는 내가 받을 거야.”
너는 그걸 받고 싶냐고 물으려 했지만 채영은 이미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지나치게 열렬했던 채영은 끝나면 또 확실하게 끝내는 스타일이다. 그게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라서 천애 고아 같은 서아에게 든든한 언니가 되어줄 모양이었다.
“나도 초콜릿 두 배로 넣은 아이스 카페모카 하나 만들어 주세요.”
지금은 단 게 필요했다. 이 민망한 마음에 위로가 되려면 단 거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기자들은 아직도 호시탐탐 우혁과 서아의 관계에서 뭔가 이상한 걸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찾는 중이다. 하지만 한낮 인적이 드문 타운하우스 길에서 서아를 업고 걷는 우혁의 사진은 대부분의 의심을 불식시켰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은 아주 좋은 장면을 만들어냈다. 타운 하우스에 친척이 사는 기자가 들어와 진을 치고 기다리다 사진을 찍었다. 우혁의 등에 뺨을 대고 있는 서아와 그녀를 업고 다독이는 우혁의 모습은 보는 사람 마음도 설레게 만들었다.
사실이니까 두 사람은 정말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니 차현준의 뒷북 따위 무서울 거 없었다. 달콤한 나의 맛에서 프러포즈 장면이 뜨면 차현준의 허접한 훼방질은 무사히 끝날 것이다.
민석은 두 사람을 생각하느라 두 배로 단 카페모카를 마시고도 무슨 맛인지 기억을 하지 못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야 혀에 남은 달콤함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미 모두 마셔버린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