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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 남자

by 은예진

서아는 설거지를 하고 우혁은 마당에서 낙엽을 치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을 발표한 이후로 민석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두 사람이 같이 살 건, 같은 방을 쓰건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더는 지킬 필요가 없다며 떠났다.


민석이 사람을 쓰라고 했지만 우혁은 이깟 일로 무슨 사람을 쓰냐며 웬만한 집안일은 자기 손으로 했다. 가진 건 시간밖에 없다며 일을 만들어했지만 요즘은 부쩍 초조한 표정이었다. 우혁이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민석은 이쯤 되면 좋은 작품이 하나 들어와 줘야 하는데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거지를 끝낸 서아가 다기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커다란 자루에 낙엽을 밟아 넣고 들어온 우혁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오빠, 차 마시자.”


서아가 부르자 우혁이 잠시 기다리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아는 다관에 국화차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렸다. 차가 우려 지는 동안 세진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서아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 세진이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남자 친구 사진도 보냈다.


<네 남편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남자지만 나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


세진이 농사를 짓고 있는 지역의 농업기술센터 직원이라고 했다. 농사꾼 처녀와 공무원의 만남이라니 어쩐지 낭만적인 느낌에 사진을 보는 내내 싱글거리고 웃었다.


서류 가방을 들고 나온 우혁이 웃고 있는 서아를 보더니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고 물었다.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던 내 친구가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거든. 그런데 거기서 농업기술센터 직원하고 연애를 하나 봐. 재미있지 않아?”

“글쎄올시다. 연애라는 게 어떤 식으로 하던지 다 재미있는 거 아닌가?”

“그런가?”

“너랑 나랑 만난 것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냐?”

“힛, 재미있는 걸로 치면 우리가 최고지!”

“그래서 시청률 칠 점 팔 프로가 나왔지.”


시청률 이야기가 나오자 서아는 우혁이 내기에서 번 돈으로 맛있는 것도 사주지 않았다며 투덜거렸다. 우혁은 서아의 코를 살짝 쥐고 흔들며 가방을 그녀 품에 안겼다.


“이거 뭐야? 명품 가방이야? 아무리 명품이라도 이런 서류 가방은 나한테 필요 없는데.”

“내기에서 딴 십오만 원보다 더 큰걸 주려고 마음먹었지.”

“그래? 뭔데?”


서아가 신이 난 듯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물었다. 우혁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서아는 가방을 열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혁은 가방의 지퍼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테이블에는 통장과 부동산 매매 계약서라고 프린트된 파일, 서류 봉투 등이 나란히 놓였다.


“이게 다 뭐야?”


서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다 우혁을 향해 물었다.


“내 전 재산.”

“이걸 왜 나한테 줘?”

“앞으로 내 아내가 될 사람이니까 너랑 같이 공유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고 어떻게 쓰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는지 설명 듣고 앞으로는 같이 관리해.”


서아는 너무 당황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도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너는 결혼해서도 가사도우미 노릇만 할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지? 너도 나랑 결혼해서 내가 얼마를 벌고 어떻게 쓰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생활비만 받아서 살면 기분이 좋지 않을걸. 그러다 얼마 안 가서 네가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 거고.”

“하지만 그건 오빠가 힘들게 일해서 버는 돈이잖아.”

“그렇지 내가 힘들게 버는 돈이지만 궁극적으로 결혼했으면 같은 경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게 맞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서아가 우혁의 목을 껴안았다.


“이거야말로 진짜 프러포즈다. 오빠 진짜 대박인데. 이거 소문나면 안 되는데. 강우혁이 이렇게까지 멋진 사람인 거 알면 경쟁이 너무 치열해지잖아.”


우혁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경쟁 따위 없어.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 남자야.”


우혁의 목을 감싸 안았던 팔을 푼 서아가 갑자기 핸드폰을 들고 은행 앱을 열었다.


“오빠가 오픈했으니 나도 오픈할게.”


서아가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받은 월급을 모아놓은 통장을 본 우혁이 기특한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모았네. 이거면 당장 파리로 유학 떠나도 되겠는데. 르 꼬르동 블루에서 공부하는 게 얼마나 드는지 몰라도 어렵지 않겠어.”


우혁의 입에서 르 꼬르동 블루라는 말이 나오자 서아의 눈가에 얼핏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서아는 최대한 빠르게 감춘다고 감췄지만 예민한 우혁의 눈에 잡히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

“나랑 결혼하는 걸로 네 꿈 꺾지 않을 거야.”


서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이야. 이렇게 행복한데 여기서 더 욕심내면 도둑놈이지.”

“너는 너무 욕심을 안내서 탈이야. 나 때문에 꿈을 접으면 언젠가는 그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반드시 욕심내!”


서아에게 케이크를 굽고 마카롱을 만드는 일은 틀림없이 생계를 위한 일이었다. 그걸 단순히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큰 애정이 담겨있었다. 우혁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달콤한 그녀의 꿈이 심장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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