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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혼주석 2

by 은예진

이제 새어머니의 가짜 사랑 따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우혁의 손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사람은 스물다섯의 서아가 아니라 달콤한 초콜릿을 먹는 제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여덟 살의 서아였다.


코가 먹먹해진 서아는 우혁의 소맷자락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 이제 오빠 덕분에 결심이 섰어.”

“그래?”


우혁은 서아의 손을 꽉 잡았다 놓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그들이 경비실 앞에 도착하자 서성거리고 있던 고윤희가 반색을 하며 다가섰다. 제인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는데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제인은 이제 살이 완전히 빠져서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차에서 내린 서아가 고윤희에게 건조하게 말했다.


“차 타고 따라 들어오세요.”

“알았다. 그런데 저 사람들한테 다음부터는 내가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게 해 주라고 하면 안 되겠니?”


서아는 고윤희의 말을 못 들은 체하고 차에 올라탔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ATM기에 들러 돈을 찾았다. 우혁은 서아가 뭘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묻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강 서방, 결혼 축하해. 우리 서아가 연예인들만큼 예쁜 건 아니지만 음식 잘하고 살림 야무지게 하니까 신붓감으로는 일등이야. 강 서방 복 받은 줄 알아.”


고윤희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 서방이라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했다. 우혁은 그런 고윤희를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몰라 난처한 얼굴이었다.


“앉으세요.”


서아의 쌀쌀맞은 목소리에 설레발을 치던 고윤희가 눈치를 살폈다. 서아가 자리에 앉으라는 말을 재차 했지만 자꾸 집 안을 둘려보려 하는 고윤희를 제인이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언니, 언니가 시험 잘 보라며 보내준 마카롱 하고 초콜릿 잘 먹었어. 언니가 만든 디저트 먹고 싶었었는데…….”

“다행이다. 시험은 잘 봤니?”


제인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플루트에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 이제 전문대 가려고 하는데 엄마가 허락을 안 해줘서 매일 싸우고 있어.”

“야, 아무리 그래도 강우혁이 처제가 전문대를 다니는 게 말이 되냐? 누가 들으면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알고 강 서방 욕해!”


서아와 우혁은 뻔뻔한 고윤희의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 고윤희는 두 사람의 반응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걱정하지 말라며 제인이 올해는 꼭 플루트로 대학을 갈 거라고 큰소리쳤다.


서아는 고윤희가 좋아하는 매실차를 내왔다.


“역시 우리 서아는 내가 좋아하는 걸 안다니까. 어머 이거 정말 좋은 매실로 만든 건가 보다. 맛이 달라. 역시 월드 스타 강 서방네 집에 있는 건 다르구나.”


서아는 그런 고윤희의 말을 무시하며 그녀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한복 해 입고 오세요. 한복 값입니다.”


순간 고윤희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입에 머금고 있던 매실차를 급하게 삼킨 고윤희가 서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럴 줄 알았어. 서아 네가 답을 안 해줘도 나는 천사 같은 서아가 아니지 진짜 천사지. 가로수길 천사지. 하여간 천사 서아가 우리를 결혼식에 못 오게 하지는 않을 줄 알았어.”

“네, 오세요. 오셔서 친정어머니 노릇 하세요. 하지만 거기서 끝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지요? 난 네 엄마가 아니다. 나한테 엄마 노릇 기대하지 마라. 저는 고윤희 씨 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는 기대하지 마세요.”


서아의 말에 고윤희가 흠칫했다.


“알아. 서아 네가 맺힌 게 많다는 거 알아. 그게 어디 하루아침에 사라지겠니. 시간이 필요하겠지. 서두르지 않을게. 미우면 그냥 미워해. 남들 앞에서 나를 엄마 자리에 앉혀 주기만 하면 돼. 그럼 아무 말도 안 할게. 고맙다. 고마워.”


고윤희는 추접스러울 만큼 비굴한 목소리로 서아에게 매달렸다.


“언니, 고마워.”


제인이 손등으로 눈을 훔치며 훌쩍거렸다. 서아는 그런 제인을 다독이며 말했다.


“돈 넉넉하게 넣었으니까 예쁜 옷 입고 와. 살 빼서 이제 옷 마음대로 입을 수 있어서 좋겠다.”

“언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엄마는 우리가 형부랑 가족이라는 걸 알리려면 그만큼 수준이 돼야 한다고 나를 얼마나 다그치는지 정말 끔찍해.”

“형부랑 가족인 걸 알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서아가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묻자 제인이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에 입을 막았다. 그걸 본 고윤희가 재빨리 다가와 제인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뭐긴 뭐야. 너를 아는 우리 주변 사람들한테 자랑하는 거지. 사람들이 죄다 나한테 묻잖아. 월드 스타 사위 보는 기분이 어떠냐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서아는 그렇게 시집을 잘 가는데 제인이는 어쩌누 하잖아. 그거 때문에 살 빼라고 다그친 거야.”


뭔가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고윤희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들을 빨리 내쫓고 싶은 서아는 더 물고 늘어지지 않기로 했다.


“청첩장은 등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청첩장 없이는 식에 참석할 수 없으니 잘 가지고 계세요.”


고윤희의 뒤에 물러서 있던 제인이 궁금한 듯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데 언니, 그날 연예인들 많이 와?”


서아가 답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우혁을 바라보자 우혁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 부를 거라 많이는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삼백 명은 될 거고 그 사람들 대부분이 연예인이지.”

“와. 생각만 해도 신난다.”

“거봐. 네가 살을 안 뺐으면 그런 자리에서 얼마나 부끄러웠겠어.”


서아가 재촉하며 쫓아내지 않으면 밤새 그렇게 자리를 지킬 태세였다. 겨우 집 밖으로 몰아내고 현관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마당으로 나간 고윤희와 제인은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마당 여기저기서 사진 찍기 바빴다.

거실 창밖으로 그런 모녀를 바라보고 있던 우혁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다고 서아에게 모녀를 결혼식에 초대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이니 그저 아무 일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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