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토요일 12시로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우혁은 굳이 호텔 결혼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방송사 측에서 미리 촬영을 위한 식장을 잡아 버리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호텔에서 하기로 했다.
우혁의 부모님 자리에는 민석의 부모님이 대신 앉기로 했다. 결혼 날짜를 잡고 분당에 있는 민석의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두 분은 다정하게 맞아 주시고 민석이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기뻐해 주셨다. 음식 솜씨가 좋은 민석의 어머니가 차려놓은 온갖 산해진미는 두 사람이 허리띠를 풀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다.
민석의 어머니는 너만 이렇게 천사 같은 색시 얻어 결혼하지 말고 우리 민석이 짝도 좀 찾아 달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어머니, 안 하는 거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걱정 좀 하지 마세요."
퉁명스러운 민석의 말에 어머니가 눈을 하얗게 흘기며 노려보았다.
민석은 두 사람을 따라 서울로 가고 싶어 했지만 오랜만에 온 아들을 보내기 싫어하는 어머니 때문에 하는 수없이 붙들렸다. 민석만큼 키가 크고 자세가 좋은 아버지와 동그란 얼굴에 인상 좋은 어머니 사이에 선 민석이 울상이 되어 작별 인사를 했다.
손을 흔들고 여러 번 허리를 숙인 우혁과 서아는 차에 타자마자 너무 많이 먹었다며 숨을 몰아쉬었다.
“참 좋은 분들이다.”
“나는 홀아버지 밑에서 컸는데 아버지도 고등학교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민석이네 집 같은 가정적인 분위기를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
“미투! 우리 둘의 유일한 공통점이네.”
“내가 너한테 신경 쓰였던 이유 중에 하나는 아마도 그 공통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오빠는 저렇게 좋은 분들이 부모님 자리를 채워 주실 수 있으니 다행이다.”
“꼭 부모님 자리를 채워야 하는 건 아닌데 방송국에서도 그렇고 민석이도 너무 허전하면 보기 좋지 않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네.”
‘달콤한 너의 맛’으로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을 발표하는 바람에 결혼식에서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반 없었다. 서아는 연예인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며 쉽게 받아들였는데 도리어 우혁이 불편해서 어쩔 줄 몰랐다.
서아는 그런 우혁에게 높은 시청률은 좋으면서 간섭을 불편해하면 너무 이기적인 거라고 다독였다. 본래 서아가 불편해하고 우혁이 다독여야 할 상황인데 거꾸로 된 것을 깨달은 우혁이 이후로는 절대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 오빠네 부모님 자리는 됐으니 신부 부모님을 고민해야 하는 건가?”
우혁과 민석은 차마 서아의 부모님 자리를 물어볼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구 작가에게도 알아서 할 테니 서아에게 부모님에 대해 묻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놓은 터였다.
우혁은 운전에 집중하는 척하며 서아의 눈치만 살폈다.
“그런데 구작이 왜 나한테는 부모님에 대해 안 물어봐. 우리 아빠가 돌아가신 은장환 피디라는 걸 아니까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할 텐데.”
우혁은 대답하지 못하고 흠흠 거렸다. 서아는 그런 우혁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며 눈을 마주하려 했다. 우혁은 운전에 방해된다며 그러지 말라고 서아를 밀어냈다.
“내 짐작으로는 오빠가 구 작가한테 서아 부모님까지 참견하면 내 부모님 자리도 비워 놓을 거라고 협박했을 것 같은데. 맞지?”
“아니거든. 구작은 내 부모님 자리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거든.”
“과연 그러실까?”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사이 차가 한남동으로 들어섰다. 집 가까이 오자 서아의 핸드폰이 두어 번 울렸고 문자도 여러 번 들어왔다. 서아는 결국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고 엎어놨다.
“누군데 그래?”
우혁이 서아가 엎어놓은 핸드폰을 흘끔거리자 서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집에 가면 알게 될 거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운 하우스 경비실에서 전화가 왔다. 지난번에 행패를 부리던 여자가 사위를 만나러 왔다며 들여보내 달라고 또 난동을 피우고 있다고 했다. 핸드폰이 블루투스로 자동차와 연결되어 있는 바람에 보안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지금 들어가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세요.”
전화를 끊지 않은 상태에서 기다리라고 하자 고윤희가 거 보라며 의기양양하게 소리 지르는 게 다 들렸다.
우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결혼 기사를 보고 부모님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저러네. 벌써 몇 번이나 연락이 왔는데 내가 모른 체했더니 찾아온다고 하더라고.”
“네 마음 편한 대로 해. 네가 저 여자를 결혼식에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무시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앉혀도 되고 그냥 비워놔도 상관없어. 다 괜찮은 거야.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
서아는 우혁의 팔을 잡고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걸 모르겠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해. 부모 자리에 앉고 싶다는 데 옜다, 먹고 떨어져라 싶다가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거길 앉으려고 하느냐고 묻고 싶고 또 그러다 엉뚱한 사람 앉혀 놓으면 그것도 보기 싫을 것 같아.”
우혁은 갑자기 차를 도로 옆 주차장에 세우고 손을 뻗어 서아를 껴안았다.
“그게 당연한 거야. 그런 네 마음 탓하지 말고 감싸줘. 자기를 엄마라고 여기지 말라고 했던 여자가 이제 와서 엄마 노릇하겠다고 나서는데 네가 어떻게 혼란스럽지 않겠어.”
우혁이 서아의 등을 쓰다듬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구나. 당연한 거였구나. 그걸 모르고 흔들리는 나
를 미워했구나. 귀찮게 굴지 않겠다고 그동안 못해준 게 미안해서 그런 거니까 친정 엄마 노릇만 하게 해 달라는 새어머니의 간절한 청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하던 내면의 어린아이는 지금이라도 새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걸 누르면 누를수록 머리를 들며 그녀를 괴롭혔다. 한 번쯤 다정한 친정엄마 흉내를 내도록 놔두고 가짜 사랑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부끄러운데 그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우혁은 서아의 마음을 다 괜찮다는 말로 다독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