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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7시간전

83. 안아줘

우혁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차현준이 뭘 얼마나 알고 선수니 초이스니 따위의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만약 호스트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면 어느 선까지 나올까?


당시 소속사 사장 우명진은 걸핏하면 동영상의 존재에 대해 떠들어 댔지만 막상 동영상의 실체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계약을 해지하면서 동영상을 언급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말로만 존재하던 동영상을 직접 확인하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우명진은 그 후 연예계에서 퇴출되어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한다. 동영상에 대해 지금까지 조용한 것을 보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차현준이 우명진과 연락이 닿은 것일까? 그럼 혹시 동영상을 손에 쥐고 저러는 것인가?


밤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호스트 동영상이 존재한다면 그게 세상에 드러난다면 우혁은 연예계 생활을 접어야 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였다. 


입술이 바짝 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신경 안정제를 찾기 위해 서랍을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서아가 오고 나서는 신경안정제 처방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 덕분에 약이 떨어졌는데도 그 사실도 알지 못할 만큼 잘 살고 있었다.


신경안정제는 일종의 비상약이었다. 갑작스럽게 감정이 혼란스러워지면 감당이 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우명진이 만들어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창밖에 어둠이 내렸다 다시 걷힐 때쯤 돼서야 서아의 존재가 떠올랐다. 


“빌어먹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서아야!”


계단을 요란스럽게 뛰어 내려가 서아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서아는 보이지 않았다. 집안을 모두 뒤졌다. 그녀가 집에 없는 게 확실했다.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당황한 우혁은 계속 전화를 걸며 집안을 뒤지고 다녔다. 그가 찾는 게 서아인지 서아의 핸드폰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점점 더 불안해지는 게 숨이 차고 현기증이 났다. 폭발 직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서아의 핸드폰을 받은 사람은 서아가 아니었다. 서아가 채영의 집에 있다는 말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우선은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이 한남 타운 하우스 안에 있다는 사실은 눈물이 날 만큼 감사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우혁이 머리를 감싸고 숨을 몰아쉬었다. 


‘차현준, 네가 원한 게 이런 거지? 내가 흔들리게 만들어서 멘털을 무너트리고 싶은 거지? 어림없다. 개자식아, 나는 너 같은 놈 백 명이 달려들어도 끄떡하지 않을 거다.’


이를 빠드득 갈았다. 우명진에게 시달리던 십 년 전 강우혁이 아니었다. 차현준 따위에게 휘둘려 중심을 잃고 두려움에 떨 나이도 아니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숨을 가다듬었다. 녀석이 가진 게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말아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한테는 서아가 있다. 혼자가 아니라 서아가 있다. 이제 예전처럼 제멋대로 굴면 안 되는 거다. 내가 흔들리면 서아는 지진을 겪게 될 거다. 정신 차려라. 강우혁!’


채영은 서아가 길 잃은 강아지 같은 몰골을 하고 있기에 자기가 보살펴 준거라고 공치사를 했다. 우혁이 진심을 담아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갔다.


일어나지 못하는 서아를 등에 업고 나오는데 그녀가 우혁을 보살피겠다고 했다. 


‘너는 그냥 그렇게 있기만 해도 존재 자체가 나를 지키는 거야. 그걸 모르냐. 바보같이.’


바보 같은 서아가 우혁의 등에 뺨을 대고 가만히 있었다. 집에 와서도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않은 우혁이 그녀를 업은 채 계단을 올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살포시 내려앉은 서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약 효과가 좋은데.”

“두통이 가라앉았어?”

“응, 두통도 가라앉고 울렁거림도 괜찮아졌어. 그런데 다른 증세가 올라와.”

“뭔데?”


서아가 입술을 오므려 이로 지그시 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오빠를 안고 싶어 졌어.”


우혁은 서아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따스한 눈길로 응시했다.


“안아줘.”


서아는 무릎걸음으로 우혁의 앞으로 바싹 다가가 손을 뻗었다. 우혁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 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을 많이 쓰는 일을 하는 서아의 손아귀 힘이 체구에 비해 강했다. 그녀는 우혁의 팔을 밀어붙이듯 움켜잡더니 반동을 이용해 그의 허벅지 위로 타고 올라가 앉았다.


“아직 술이 덜 깬 척 오빠를 안을 거야.”


우혁이 대답을 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서아의 입술이 우혁의 입술을 덮은 뒤였다. 우혁은 눈을 감고 서아가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겼다. 손길은 부드럽지만 움켜쥐는 힘은 강한 서아의 손이 우혁의 몸을 탐하기 시작하자 전율에 휩싸였다.


“서아야!”


서아는 확인하고 싶었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눈앞에 보이도록 만들고 싶었다. 지난밤 느꼈던 쓸쓸한 마음을 기폭제 삼아 달리는 이 폭주의 끝에 결코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고 싶었다. 


우혁은 서아의 몸을 안에 가둔 채 손바닥과 무릎을 침대에 고정시키고 팔다리를 세웠다. 한쪽 손을 침대에서 떼어내 서아의 어깨와 목을 쓰다듬었다. 똑바로 누워 우혁을 올려다보는 서아의 눈이 한층 짙어져 있었다. 


“혼자 놔둬서 미안해. 앞으로는 절대 그렇게 혼자 있게 하지 않을게.”


서아가 흐릿해진 눈빛으로 양손을 들어 우혁의 뺨을 감싸 쥐었다.


“쉿! 이제 그만. 지금은 그런 말 할 시간이 없어.”


서아의 입술이 천천히 우혁의 입술을 덮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하지만 곧 강렬하게 영혼까지 섞어버릴 기세였다. 우혁의 방은 세상과 다른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랑은 물리학의 법칙을 거슬러 시간을 비틀고 잘라서 재편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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