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지난 수요일에 한 달간 괜찮았던 어지럼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여행 출발일은 토요일 아침인데 수요일에 어지럼증이 시작되니 나는 여행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요일에 비행기를 취소하나 금요일에 취소하나 위약금이 똑같다는 말에 좀 기다려보기로 했다.
수요일은 몹시 어지러웠지만 목요일은 조금 더 낫고, 금요일은 또 조금 더 좋아졌다. 아, 이 정도면 여행을 떠나도 큰 문제는 없겠다 싶었다. 최소한 민폐를 끼칠 일은 없었다. 그런데 토요일 새벽 4시쯤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는데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알았다. 오른쪽에 이석증이 왔구나. 한마디로 이건 x 됐다는 것이다. 일어서서 거실로 나오는데 몸이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자 누군가 나를 바이킹에 올려놓고 360도 돌린 것처럼 느껴졌다. 여행 당일 아침에 취소하고 병원을 다녀오면서 내가 입은 심리적 타격은 생각보다 컸다.
내 몸이 좋지 않으니 평소에 여행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출발 당일 아침에 이렇게 되는 건 또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그 좌절감에 주말 내내 시달렸다. 내 성격은 기본적으로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아서 좋은 일을 호들갑스럽게 좋아하지도 않고 슬픈 일에 너무 기가 죽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눈을 뜨자 머릿속에 문득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한없이 가라앉을 뻔했던 내 마음에 동아줄 하나가 내려온 것이다. 연애고자와 연애고수들의 차이점은 연애가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연애고자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썸을 타기도 전에 같은 회사 사람인데 만약 헤어지면 어떻게 하지? 저 남자 아직 결혼할 준비가 된 것 같지 않아서 결혼이 순탄하지 않을 것 같은데 등등 김칫국을 엄청나게 마신다.
하지만 연애박사는 일단 시작해 보고 아니면 헤어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사랑의 해피엔딩이 반드시 결혼도 아니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라고 나쁜 사랑도 아닌 것이다.
동생이 자기 여행에 나를 데려가준다고 했을 때부터 시작된 여행 준비는 즐거웠다. 여행지에 들고 다닐 가벼운 가방을 사고 ( 남은 건 가방뿐이다. 가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아주 흐뭇하다. ) 온라인 면세점에서 립스틱과 귀걸이를 사놓고 다이소에서 여행용 화장품 파우치를 샀다.( 기초화장품부터 샴푸린스, 클렌징까지 포함된 16절지 모양의 키트 이거 대박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사랑이었다. 결국 떠나지는 못했지만 나는 기다리는 동안의 즐거움을 충분히 누렸고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주제를 알고 가지 않겠다고 했어야 하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했다.
여행 가봤자 무슨 재미가 엄청 있겠어. 몸만 힘들지. 내가 돌아다니려면 정말 힘들었을 거야.라는 여우의 신포도로 정신승리 하지 않는다. 기다리는 동안 즐거웠던 마음 그 절반의 행복으로도 좋았다고 기억하고 싶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