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약물중독
요즘도 일일 드라마에 가끔 등장하지만 예전에 훨씬 자주 보던 장면이 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주인공이 갑작스러운 통증에 가방을 뒤지는 장면이다.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약을 꺼냈지만 약병이 손에서 미끄러져 굴러간다.
당황한 여주인공은 서둘러 약병을 열고 물도 없이 약을 털어 넣는다. 극심한 고통은 잦아들고 여자는 바닥에 기대앉아 숨을 돌린다. 이런 진부한 클리쉐를 요즘 내가 현실에서 실현시키고 있다. 역시 현실은 드라마보다 잔인한 법이다. (이런 진부한 표현이라니 나는 확실하게 진부해지기로 했구나. )
어지럼증이 좀 덜 한 것 같아 디아제팜과 보나링정을 먹지 않고 잤다. 새벽녘이 되었을까 잠결에 내가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석증처럼 완전히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은 아니지만 어지러움 때문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식탁 위에 있는 약병을 찾아들었다. 약병을 여는 내 손은 힘이 없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몇 걸음 더 걸어서 정수기에서 물을 따를 기운도 없어 입에 약을 털어 넣고 식탁에 몸을 기댔다.
입에서 약이 녹아 들고 나는 조금씩 숨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너무 많은 약을 먹고 있는 나는 결국 약 때문에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말기 암도 아니고 비련의 여주인공도 아닌데 이렇게 진부해도 되는 것일까?
아침을 먹고 또 약을 한 움큼 먹은 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나중에 나온 남편이 바닥에서 주황색 약을 하나 주워 들었다.
"이거 버릴까?"
나는 약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센시발인데. 내가 먹을 때 빠트린 걸까 아니면 먹으려고 챙길 때 병에서 굴러 나온 것일까? 에라 모르겠다. 나는 남편이 주워 든 약을 빼앗아 또 먹어 버렸다. 그러니까 우울증 약을 곱절로 먹은 걸 지도 모른다.
어쩐지 오늘은 좀 더 몽롱하다. 디아제팜과 보나링정과 곱절의 센시발이 환상의 콜라보를 이루는 날이다. 나는 한껏 자애로운 마더 테레사가 된 기분이다. (마더 테레사가 그다지 자애롭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누가 나한테 돈이라도 꾸어 달라고 하면 지갑을 탈탈 털지도 모르겠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