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불가능한 시험

검은 나비

by 은예진

“아씨, 아씨, 대정 권번에서 사람이 왔는데요.”

“뭐라고?”


책을 보고 있던 본이가 고개를 들자 홍란의 집에 있던 행랑어멈이 본이를 보고 아는 체를 한다. 본이는 소향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대정 권번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말라며 쫓겨났지만 어쩐지 그게 끝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설 아씨, 행수님이 소향 아씨 소식을 알았다고 모셔오랍니다.”

“정말이오? 무슨 소식이랍니까?”

“정확히는 모르나 나쁜 소식은 아닌 듯싶으니 어서 가십시다요.”


행수는 본이가 들어서자 편지 한 통을 내밀며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려 가볍게 웃었다. 웃음에 친근한 기색이 묻어났다. 본이는 편지에 무슨 내용이 있기에 이러나 싶어 재빨리 펼쳐 들었다.


소향의 필체는 그대로 족자를 해 걸어도 될 만큼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운문을 이렇게 아름답게 쓰는 사람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동그란 이응, 각이진 기역 하나하나가 그림 같았다. 그러한 글씨로 자신이 지금 대동강 강가에 서서 마음을 정리하는 중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형님 마지막으로 임제 선생의 대동강 노래 한 줄 보내드립니다.'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 꺾어

천 가지 다 꺾어도 가시는 임 못 잡았다.

어여쁜 아가씨들 눈물 때문일까

안개 물결 지는 해에 근심만 가득하다.


'형님 하지만 저는 근심을 이 물결에 다 떠나보내고 가겠습니다. 소설이란 아이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네가 제법이구나!”


본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는 말을 연속했다. 혹여나 정말 소향이 투신이라도 한 것은 아닐까? 가슴 졸이던 나날이었다.


“이제 마지막 시험이 남았구나. 그래 계속할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이냐?”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시작한 일을 끝까지 가지 못하면 그보다 부끄러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점점 당당해지는구나. 기고만장하게 구는 것은 골치 아프지만 기생에게는 이러한 당당함도 필요하다. 요즘 삼패 기생이나 일본 기생 때문에 우리가 천한 창부 취급을 받지만 우리는 여느 창부와는 다른 예기다. 그러니까 자존심을 지키고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하기는 하다.”


본이는 행수의 칭찬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세 번째 시험은 김석중 선생이라는 분이다. 명월관에 자주 오시는 편이지만 태화관이나 다른 곳에도 곧잘 나타나신다. 워낙 따르는 사람들이 많고 존경받는 사상가이자 민족 운동가인데 이분이 우리한테 골칫거리인 것이 기생을 너무 싫어하신다. 본인 술자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술자리도 기생을 불렀다는 말만 나오면 그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선생에게 미움을 받는다. 네가 이분의 술자리에 가서 기생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봐라.”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해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본이가 일전에 김석중 선생이 신문에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당국이 일본에서 기생을 데리고 들어와서 영업하는 점부터 색작 송병준을 비난한 것까지 기생이라면 치를 떠는 분이셨다.


기생들은 조선의 정신을 색으로 얼룩지게 한다고까지 하신 분이다. 그런 분에게 기생을 받을 수 있게 하라니 차라리 여기서 시험을 그만두라는 말로 들렸다.


“행수님, 저를 왜 부르셨나요?”

“무슨 말이냐?”


“저도 김석중 선생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압니다. 그분이 술자리에 기생을 부르게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건 저보고 여기서 그만두라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행수 기생 명주는 지그시 내리깔고 있던 눈을 치켜들어 본이를 쏘아보았다.


“너는 내가 처음에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구나. 홍란이가 우리 권번에 들어와 기생 수업을 받은 것이 몇 살인 줄 아느냐? 그 아이는 아홉 살 때 권번에 들어왔다. 어린것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저녁 아홉 시까지 온갖 수업을 다 받은 아이다. 그런 아이와 같이 기생하겠다며 그 많은 시간을 날로 먹으려 들면서 이 정도 시험이 쫓아내려는 거라고? 그러면 여기 있는 기생들은 모두 열서너 살 때 쫓겨나서 남은 아이들 하나도 없겠다. 당장 나가거라. 우리 권번은 아직 조선 최고의 예기들이 모인 곳이라는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곳이다. 필요 없다. 썩 나가거라.”


순간 본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릿발 같은 행수의 호통에 자신이 어리광을 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빨리 엎드린 본이가 행수의 목소리 이상으로 강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해보겠다는 것이냐?”

“당연히 해야겠지요.”


“고개 들어봐라. 네가 만약 이번 시험을 통과하고 기생이 된다면 네가 느끼기에 이보다 훨씬 황당한 요구와 기대가 너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네가 좀 전에 말했듯이 무엇이든 시작을 하면 끝을 보고 그 뒤에 결정해야 한다. 기생이 되었으면 경성 바닥을 흔들어 놓고 그만두든지 말든지 해야 할 것이며 시험을 시작했으면 통과하건 통과하지 못하건 끝까지 가야지. 그래야 무엇을 하건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되는 거다. 가거라. 명월관에 김석중 선생이 나오시면 내 연락하겠다.”


본이는 그날부터 김석중 선생이 쓴 글이란 글은 모두 찾아 읽기 시작했다. 신문에 기고한 글부터 책이나 잡지까지 찾아 읽을 수 있는 것은 다 찾아 읽었다. 김석중 선생은 이 시대 마지막 선비로 칭송받는 분이다. 그 선비 정신이 지나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자신과 강자에게는 엄격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분이었다. 특히 배고픔에 시달리는 소작농들과 기생이나 신여성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남편에게 소박맞는 구여성들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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