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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Mar 25. 2024

나는 소를 진료하는 동물병원의 직원입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오마주한 제목을 지어봤다. 페트릭 브링리는 큐레이터도 아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잡부에 가까운 경비원이었다. 그런 브링리가 뉴욕의 상징이자 미국에서 가장 큰 세계 5대 박물관중 하나로 손꼽히는 메트로폴리탄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사랑하던 형 톰의 죽음 때문에 무기력감에 빠진 브링리는 잘 나가던 뉴요커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이민자들을 비롯해 다양한 전직을 가진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인 경비원 그룹의 일원이 되어 아무 생각 없이 스스로를 놓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브링리는 그곳 메트로폴리탄에서 오직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을 하며 혈육을 잃은 상처를 회복하고 아름다운 미술품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아갔다. 


미술을 전공한 전문가도 아니고, 큐레이터도 아닌 그야말로 미술이나 박물관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브링리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대해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다니. 책장을 넘기면서 묘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수의사가 아니다. 그러니까 동물병원에 근무하지만 약사도 수의사도 아닌 내가 소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동물병원의 이야기를 쓴다는 게 좀 우습게 여겨질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서 직접 소를 진료하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쓴다면 훨씬 흥미로울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링리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대해 큐레이터와는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수의사와는 또 다른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페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남편은 허영은 많고 일은 하기 싫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악하거나 무례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과 경제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혼 전 그런 사람됨을 본 엄마가 간곡하게 헤어질 것을 권했지만 어리석은 나는 다 알면서도 내가 잘하면 될 줄 알고 그 사람과 결혼했다. 


결혼 생활은 누가 봐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내가 결혼 전에 학습지 교사를 하면서 번 돈으로 마련한 신혼집마저 날려버린 남편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고향을 뜨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나는 남편과 헤어지고 싶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나는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는 헤어지면 갈 곳도 없는 남편에게 연민이 남아 있었다. 준거 집단과 소속 집단의 괴리 속에 힘겨워하는 그가 (한마디로 노력은 하기 싫고 눈만 높은) 안쓰러웠다. 결국  우리는 같이 고향을 떠났고 지도를 보고 아무 데나 갈 곳을 정하는 심정으로 찍은 것이 그래도 연고가 하나쯤은 있는 동생이 사는 고장이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서 남편은 여전히 고향을 떠나고 이십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잦은 이직과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논리를 펴며 살고 있다. 세상 다정한 마음과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이다. 진지하고 비논리 정연하게  자신이 왜 이 일을 할 수 없는지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쉰다. 


남편이 그렇게 사는 동안 나는 수의사 부부인 동생네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에서 이십 년 이 넘도록 근무하고 있다. 온종일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은 곳에서, 최저 시급을 넘길 수 없는 일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전정신경염으로 쓰러진 이후에는 조금만 무리해도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므로 여기가 아니면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제부가 오너인 수의사라서 걸핏하면 병원 가느라 빠지고 걸핏하면 아파서 출근하지 못하는 나를 봐주고 있는 것이다. 


브링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십 년을 근무하며 이토록 아름다운 글을 썼는데 이십 년이 넘도록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겨우 신세타령이나 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비록 수의사는 아니지만 그래서 진료뿐만 아니라 조금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한 때는 여기서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했고, 또 한 때는 이러고 있는 내가 한심 했으며 지금은 다른 일은 할 형편이 못돼서 출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다. 집에 있으면 더 아프기만 하니 돈을 내고라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월급을 주는 우리 수의사한테는 비밀이지만 말이다. 


한창 경기가 좋을 때는 소를 키우는 목장주들 조차 무섭다고 느껴질 만큼 수익성이 뛰어났던 한우 사육 시장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의사의 일도 점점 줄어들 것이고 (이미 줄어들었고) 목장주들은 할아버지가 되어 가고 있으며 나도 중년의 끄트머리를 향해 간다. 


삶에도 일에도 석양의 주홍빛 물이 들기 시작하는 기분이다. 이것 또한 순리이니 끄트머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야 할 것이다. 떠날 시기를 놓친 나는 하는 수 없다. 여기서 끝까지 가는 거다. 이왕 가는 거 이야기라도 풀어보자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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