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리스 Mar 20. 2020

Hello stranger! 영화 클로저

사랑과 상처 사이

2005년 개봉, 감독 마이클 니콜스, 주연 나탈리 포트만, 주드 로, 줄리아 로버츠, 클라이브 오웬     

클로저란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새로운 영화들이 넘쳐나지만 새로운 스토리와 감정에 몰입할 에너지가 없을 때도 있지요. 20대에 봤던 클로저는 제 머릿속에 막장드라마로 기억되어 있는 영화입니다. 다만 영화의 ost가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I can't take my eyes off you


가사는 두 부분밖에 못 알아듣겠지만. 가수의 허스키한 음색과 기타 선율이 왠지 낭만적 감성을 일으킵니다. 저는 동일시의 여왕이라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양 잠시 그런 감상에 빠지는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그냥 좋기도, 그럴듯한 이유를 댈 수 있게 좋기도 했습니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첫 장면인데 거기에 그럴듯하게 멋진 이유는 없습니다.

앨리스와 댄의 첫만남

그저 빨간 머리의 나탈리 포트만이 펑키 스타일을 하고 길을 걷는 장면만으로 설레었을 뿐입니다. 저도 빨간색 숏컷에 짧은 치마를 입고,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하고 싶네요. 그리고 매력적인 낯선 남자와 계속 눈을 맞추며 걷다가 택시에 부딪혀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살짝 다친 후 그와 연인이 되고 싶습니다. 게다가 그는 나를 주인공으로 책을 썼으니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가요!     


저 같은 낭만적 사랑의 노예들은 우연을 좋아합니다. 특히 첫 만남의 우연성에 저는 정신을 못 차리는 편입니다. 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비포선라이즈의 셀린과 제시도 기차에서 우연히 만납니다. 그 둘은 모르는 사이지만, 왠지 모르게 서로를 흘깃거리다가 몇 마디 나누고는 기차에서 내려 버리죠. 저는 비포선라이즈를 본 후 아직도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랑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따져본다면 모든 만남은 우연입니다. 흔히 우리가 연애하게 되는 평범한 루트-가령 동호회에서 누군가 알게 되어 썸을 타다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도 우연입니다.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 같은 동네에 살게 된 것, 소개팅 자리에 하필 네가 나온 것 모두 다 우연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연은 그다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지요. 머리로야 모든 만남은 우연이고 특별한 거라지만. 정말 우연 중의 우연인 만남만이 우리에게 계시가 됩니다.  낭만적 사랑의 환상을 비판하는 작자들이 많은 것을 알지만, 영화의 잔상이 남아있는 잠시라도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영화는 결국 저를 씁쓸한 현실로 잡아끄는데, 운명적 사랑도 결국 평범하고 진부한 연애가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그들은 우연의 계시를 받아 만났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운명 같았겠죠. 그런데 바람을 피우고 싸우고 욕을 합니다. 서로의 밑바닥까지 드러내며 못 볼꼴을 봅니다. 평범한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말이죠.  지금 의 사랑도 그런 걸까요. 모든 저의 연애가 그래 왔음을 몇 번이나 경험해놓고도 지금의 사랑은 다를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는 저의 멍청한 순진함에 경의를 표해야 할까 봅니다.

다만 이제 그런 멍청함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냉소적일 바에는 차라리 멍청하고 순진해서 또 속고 마는 사랑을 것 같습니다


20대의 가 이 영화를 막장드라마로 기억했던 건, 불륜과 잡한 얘기가 난무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30대 중반의 가 본 이 영화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막장이 곧 현실임을 알아버렸 달까요. 저는 주인공 4명 모두의 마음에 공감이 됐는데, 그들의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고 찌질한 말과 행동들이 모두 있을법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안나와 댄

안나와 댄은 연인이 있음에도 바람을 피웠습니다. 20대의 저는 도덕적 올곧음이 너무 강했었는지. 그들을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연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좋아하다니! 그러나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고 그 사람을 탓할 수 있을까요. 마음은 아프겠지만 솔직히 말하지 않고 나를 기만한 것에 대해서만 약간 비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앨리스는 댄이 바람피운 것을 알고도 다시 안아달라고 말합니다. 내 연인이 바람피운 것을 알고도 당장 그를 놓을 수 없어 안아달라고 하는 그 마음이 슬펐습니다. “멍청아, 빨리 떠나 버려. 그 새끼는 바람피웠는데도 뻔뻔하잖아.”라고 앨리스를 탓할 수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안나는 댄이랑 만나는 중에 래리와 결혼해버렸습니다. 대체 왜 나랑 결혼했냐는 물음에 안나는 당신과 결혼하면 좋아질 줄 알았다고 말하죠. 아! 왜 저는 이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은지. 아마 안나는 직관적으로 댄이랑 헤어질 수 없음을 알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 사랑은 너무 위험해 보여 래리를 안정을 구하는 도피처로 삼았던 것 아닐까요.

‘댄이 앨리스에게 가 버리면 어떡해. 나도 누군가 있어야지.’

‘결혼하면 이 사람이 좋아질 거야. 안정을 찾으면 괜찮을 거야.’

여기서 이런 마음으로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훈은 교훈일 뿐. 아마 우리는 계속 후회 가득한 멍청한 선택들을 하며 살겠지요.


마지막에 안나는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마는데, 이혼 서류에 도장까지 받아놓고, 래리 곁에 머물기를 택한 것입니다. 이혼 서류에 도장 찍는 조건으로 래리의 이상한 요구도 들어줘 놓고서는 이게 무슨 짓인지요.

 (래리: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줘. 그럼 도장 찍을게.)

결국 안정을 택한 걸까요. 안나의 선택을 이해할 듯 말 듯 합니다. 


이 영화의 현실 고증 중 하나는 ‘자기 여친이 다른 남자와 잤는가’ 가 남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는 점입니다. 앨리스와 안나는 자기 남친이 딴 여자랑 잤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걔랑 잤어? 좋았어? 어디에서 했어? 저 소파에서? 오르가즘에 도달했어? 이 창녀야!”
이는 래리가 방금 자기도 창녀랑 자고 와서 하는 말입니다.


또 래리는 댄을 열받게 할 목적으로 “나 니 여자랑 잤어. 열 받지?” 하는데 댄은 진짜 참을 수 없어 합니다. 결국 “너 정말 래리랑 잤어? 난 정말 괜찮은데, 그냥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야 어쩌구 저쩌구” 헛소리를 하다가 앨리스도 안나도 잃게 됩니다. 본인도 안나랑도 자고 앨리스랑도 잤지만요.

앨리스에게도 차인 댄.....


남자에게 있어 가장 큰 모욕은 딴 남자가 자기 여자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해서 속상한 것이 아닙니다. 들의 분노는 내 것을 건드린 데에서 옵니다.
이 유아적 자기중심성과 나르시시즘을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 영화의 마지막은 ‘역시 여자는 알 수 없는 존재’라는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앨리스의 진짜 이름은 제인이 맞았습니다. 4년간 사귄 연인에게 끝까지 앨리스였던 그녀는 안면만 있는 래리에게는 진짜 이름을 말했습니다.  

앨리스의 진짜 이름은 존스

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내 진짜의 한 부분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 사람이 나의 모든 걸 잠식해 버려서,

나의 모든 걸 그 사람에게 주어서,

다 주었다가는 내가 사라져 버릴까 봐,

내 거 하나는 남겨두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내 것 하나는 남겨두어야 안심할 수 있는 보루가 진짜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내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모두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나의 자아에 대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이에게 다 주게 되지요. 그랬는데 그가 떠나버리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그럴까 봐 우리는 두려운 것이 아닐까요.   

   

나를 지키려는 방어본능은 제삼자의 눈에 알 수 없어 보이는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법. 분명치 않아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나조차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어 보이는 선택들, 우리는 늘 그런 걸 하고 삽니다. 어쩌면 그때의 나에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I feel prett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