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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을 관음하는 재미

일상과 특별한 순간

by 엘리스


(이 글을 2022년 7월에 썼습니다.)


나는 원래 SNS를 전혀 하지 않았다. 나를 전시하는 것이 쑥쓰럽고 오글거린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SNS는 내가 필연 과도한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또 남 사는건 그렇게까지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sns를 해보고 나서 얘긴데, 모르니까 궁금하지도 않은 것이다. 알아야 궁금하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에 페북과 인스타그램을 가입했다. 그 계기랄 것은, 모든 고유한 인간의 고유한 사건이 그렇듯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내 파트너 ㅁㅁ은 몇달 전 다른 사람과도 연인관계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폴리아모리를 해보면 어떠냐는 거였다. 나는 그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대체 누구길래 나에게 폴리아모리를 제안할 정도인가. 누구라도 궁금해서 미칠 지경일걸. 연애를 안하는 사람도 나의 궁금해짐을 십분 공감할 것이다.


게다가 파트너와 상대방은 SNS에서 알게 된 사이였고, 그게 오프라인 만남으로 이어져,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누가 SNS로 사람을 만나. 이상한 사람들만 있는거 아냐."는 옛날 얘기다. 내가 옛날 사람이었다.


아무튼 나는 영희(가명.일부러 촌스럽게 작명)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하여 그날로 페이스북에 가입한다. 거기에서 영희의 사진을 보았고, 영희가 올린 글도 모조리 읽으며 영희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영희는 페이스북에 거의 매일같이 글을 올렸다. 일기같은 글을 쓰기도, 자기가 간 카페를 사진찍어 올리기도, 다른 게시글을 공유하기도 했다.


영희는 몇년간 꾸준히 sns에 자기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sns를 보니 그 사람이 보였다. 감히 다 알 수는 없겠으나 그의 얼굴, 관심사, 그리고 그 사람의 정서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영희는 솔직하고 열심히 글을 작성했기 때문에 나는 영희의 인생에서 중요했을 사건이나 영희의 정서, 그리고 지금 영희의 마음을 조금씩 읽어낼 수 있었다.


가입하고 한달은 영희의 게시물만 열심히 확인했다. 새 게시물이나 사진이 올라오면 얼른 보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덤덤해지듯, 이제 영희의 게시물을 보긴 하지만 그것만 보기에는 심심한 상태가 되어갔다. 그래서 새로운 타인의 삶을 찾아나서게 됐다.


sns를 하고 이전과 달라진 점

책을 읽다가 작가가 맘에 들면 인스타그램에 검색해본다. TV를 보다가 궁금한 사람이 생겨도 마찬가지다. 몇몇은 팔로우를 하기도 했다. 근데 이게 웬걸! 타인의 삶을 관음하는 재미는 생각보다 중독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요즘 좋아보이는 삶들을 기웃거리고 있다. 나와 비교하고, 그래서 좌절하면서 동시에 안도하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좋아보이는 삶이라고 해서 매일 특별하고 멋진 순간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만큼은 나이가 들었다. 지금의 나는 좋아보이는 삶들의 (반복되는)일상도 머릿속으로 꽤나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다. 그 덕에 부러운 삶을 보면서도 나는 좌절만 하지는 않을 수 있었던 것이겠다.


핫플레이스, 예쁜 외모, 쩌는 몸매, 명품 옷 전시는 SNS의 폐해로 지적되는 비교불행의 전형적인 사례가 된지 오래다. 전형적인 사례가 됐다는 건 그 실상이 우리 귀에 이미 많이 들렸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미 안다. 그 모습이 진실이나 보편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 역시 그런 이미지의 전시로는 부러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외려 어떤 것은 '음...내가 창피하구만' 하게 되기도 했다. 가령 스노우 카메라로 찍은 비정상적인 인형 얼굴 같은 것들에..나는 대리수치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하는 생각, 삶의 양식, 성취한 목표, 맺고 있는 관계들이 부러웠다.

내가 매력을 느낀 사람들을 한 단어로 포괄해서 말하려면 '그리 많이 유명하지는 않은 창작자'가 적당하겠다. 쓴 책이 엄청난 베스트셀러는 아닌 작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일반인, 대중적이지 않은 인디밴드 등이다. 그들은 자유롭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꿈을 포기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였다. 또 어느정도의 팬들이 있고,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지지를 받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러나 생활인이 된지 13년차인 나는 그 이면의 불안감과 지난한 노동을 읽게 된다.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보이는 그 모습들이 거짓이란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런 순간들이 그들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안다.


일간 이슬아를 읽으며 그녀의 규칙적인 하루와 성실한 글쓰기 노동을 보았다. 이슬아는 20살때부터 월세를 내기 위해 노동했고 그만큼 직업이력도 다양했다. 그 모든 글자들이 현실로 펼쳐졌던 시간은 10년이 넘고 그 기간은 노동과 성실하고 반복되는 루틴으로 채워졌을거다.


환상이 사라진다는 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없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잔잔함을 주었지만, 동시에 인생을 너무 재미없게 했다. 좌절도 없고 기대도 없는 삶이 되어 버린 것 같달까.


파트너 ㅁㅁ 덕분에 나는 그동안 내 세계에서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어떤 모임들에서 우리는 젊은 창작자들을 만났다. 창작자 모임은 아니었으나 많은 이들이 나의 세계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글을 쓰는 작가, 사회문제를 주제로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 문화기획자, 음악하는 사람, 사회운동가 또는 이 모든 것에 관심있는 사람. 자기 책을 낸 이도 2명이나 있었고 자기 음원을 발표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창작자들을 부러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는 삶은 내가 성의없는 상상을 하던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내 상상은 그것이 진지한 관심이나 열망은 아니었기에 필연적으로 빈곤할 수밖에 없었다.


생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내년은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될까. 어떤 작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될까. 그들은 모두 생계 걱정을 안고 있었다. 그 불안감과 함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자유와 불안감은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른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으로 출근하는 대신에,

속해 있는 조직에 알맞은 규범을 갖춘 사회인이 되는 대신에,

그 대신에 내가 얻는 안정적인 월급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아 연금복권이 되면 좋겠다.)

을매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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