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Santiago
이제는 한 풀 꺾인 MBTI열풍, 나는 MBTI를 어느 정도 신뢰하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 MBTI의 전형적인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MBTI는 네 가지 모든 항목에 대한 성향이 95%를 넘어선 극단적인 ESTJ 그 자체이다. 사교성은 좋으나 계산적이고 계획적이며 논리를 중시하는 결과주의자. 모든 일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실용적이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한다. 이 성향을 회사일에 접목하니 회사에서는 내 결과물, 우리 팀에서 나온 결과물은 가공할 필요 없이 완벽하다는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고 일하고 있던 어느 날 함께 일하던 팀원에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라
헤이님과 일하면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지만
헤이님의 기대를 충족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일은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는 건 아닌가, 내가 하면 1시간이면 될 일을 그렇게 긴 시간을 배정해 주는데 더 좋은 퀄리티를 내길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각했던 것은 10년 차인 나도 학원을 다니고 공부를 지속하는데 아직 주니어인 너도 성장하려면 어렵다는 핑계로 피하지 말고 개인의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였다. 말 그대로 젊은 꼰대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자기변명을 약간 하자면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케어해 주는 팀장이 되기보다는 나를 떠날 때, 우리 회사를 떠날 때 경력 기술서에 장문의 성과를 쓸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내 목표는 달성했고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팀, 완벽한 팀으로 평가받았지만 팀원 누군가에겐 버거운 팀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회사에서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일 잘하는 직원으로 평가받게 되었지만 나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만족스럽게 만드는 과정이 버거워지게 되어 버렸다. 그때 그 팀원의 피드백을 받아들이고 조금은 내려놨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편안했을까?
후회는 의미가 없다. 이미 "이상한" 상태가 되어 버렸으니 이제 수습하고 바꿔가야겠다. 내 성향을 통째로 바꿀 수 없다면 이 성향을 이용해서라도 바뀌어 보리라. 그래서 바꾸는 것도 "프로젝트"처럼 "기획"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마음먹은 것은 "탓하기"
남 탓을 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니다. 하지만 내 탓만 하는 것은 나를 갉아먹는 일이다. 나는 늘 모든 문제의 초점을 나에게 맞췄다.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이런 상황이 왜 생긴 것 같냐는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그냥 제가 문제인 것 같아요"라고 답변했다. 나는 항상 내가 실수했을 것이다, 내가 잘못했을 것이다, 내가 잘하면 된다라며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아냈다. 아마 그 편이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문제를 찾는 것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일이었고 다른 문제를 분석해서 탓하는 것은 피곤했으니까. 나는 문제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나의 "이상한" 상태에 대한 원인을 "상황"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지난 2022년 6월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았다. 우리 가족들은 나뿐 아니라 모두가 심각한 상황일수록 이성적인 사람이 된다. [슬프다]는 감정보다 앞으로의 치료 계획이 먼저였고, 치료가 어려울 경우를 대비하여 아버지를 행복하게 만들어 드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 노트북을 열고 서치를 시작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던 아버지는 그 해 9월 결국 내 곁을 떠나셨고, 나는 처음 진단받은 6월부터 아버지를 보내드린 그날까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방법을 찾아야만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숨김없이 원 없이 슬퍼할걸 그랬다. 아버지와 더 솔직한 감정을 나누고 나를 단련하는 시간이 분명히 있어야만 했다. 내 "이상한" 상태는 그때 이미 시작이 됐고, 나는 3번째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상한" 상태가 생겼을 때 멈추고 돌아보고 쉬어갈 틈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내 "이상한" 상태의 원인은 그냥 "나"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했을 때 충분히 쉬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두 번째로 마음먹은 것은 "솔직해지기"
나는 일에 있어서 굉장히 직설적인 피드백을 하는 사람이지만 솔직하지는 못했다. 나 스스로가 가장 중요하고, 나의 감정을 소비하는 일을 너무 싫어했기 때문에 오히려 관계를 끊어버리더라도 싫은 소리는 안 하는 게 편했다. 잘못생각했던 것 같다. 큰소리를 내고 화를 내고 싸우는 것 만이 감정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의 감정을 복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싸웠다면 그 과정에서 복구하고 메꿔졌을 텐데 생각이 참 이기적이고 어렸던 것 같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어느 날, 가족들과 대화를 하다가 어머니가 갑자기 "그건 아니다"라며 날카롭게 대답한 적이 있다. 평소 같으면 나 혼자 기분 나쁜 상태로 넘어갔을 텐데 마음먹은 대로 솔직하게 한마디 해봤다. "엄마, 그게 아니더라도 그런 말투로 말하면 나도 기분이 안 좋아" 돌아오는 대답이 시원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화들짝 놀란 엄마가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그날 내 감정은 소비되지 않았고 조금 실금이 가더니 말끔히 메꿔졌다. 그때 알았다. 솔직하다는 것은 날카롭게 직설적으로 찌르는 게 아니라 나의 감정과 내용을 상대에게 충분히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마음먹은 것은 "좋아했던 것 되찾기"
일이 전부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내 성향에 굉장히 찾고 경험하고 느끼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비효율적인 일이었기에 좋아했던 것을 되찾아 보기로 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여행을 참 좋아했다. 그것도 혼자 떠나는 여행을 정말 좋아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나마 집을 떠난 것은 모두 출장이었고 국내 여행조차 제대로 가보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에 온전히 몰두하기 위해 과감히 돈 버는 일을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오랜 시간 버킷리스트로 간직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좋아하는 것을 되찾고 나를 단단하게 단련시켜 보기로 했다. 그 길에서 성장한 나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그렇게 나는 떠날 준비를 시작했고 여행의 설렘 속에서 조금은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어쨌든 모두 해내려면 내려놔야 한다. 모두가 나와 같을 것이라는 상대에 대한 기대도, 내가 문제라는 나를 탓하는 것도, 일도, 그리고 생각도. 3월 22일 내일모레면 나는 회사를 떠나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조금 더 단단해지고 견고해지길, 헤이 너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