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조약돌 셋 09화

딜레탕트의 흥청망청 멜랑콜리

금 金

by 하이디 준

바보로 지내는 일상이 조금 지칠 때면, 나는 하루쯤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가사가 없는, 네오클래식이라고 명명된 애매한 장르의 음악을 틀어놓고, 게을러서 도무지 끝내지 못하는 책과 글을 다시금 마주한다. 그러고 있노라면 그나마 살짝은, 정신이 드는 것도 같은, 꿈에서 깬 것만 같은 (따뜻하고 행복한 꿈이 아니라 마약과 구름 같은 안개로 뒤덮이고 숨막히는 꿈) 기분이 든다.


그 중에서도 막스 리히터의 곡들을 좋아한다. 대부분 영화 OST이고 소품 같다고 할까, 그런 곡들을 뭐라 부르는지 모르지만, 보통 단순한 선율이 살짝씩만 변주되면서 반복되고, 감정을 점차 고조시키는 곡들이다. 앨범 중에서도 사실 리히터 본인의 앨범보다, 다른 이들이 연주한 ‘Portrait : Max Richter’ 앨범만 주구장창 듣곤 하는데, 왜 굳이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비평가가 될 소질 따윈 없고, 그런 걸 표현할 말주변조차 아주 많이 녹슬어버려서, 좋지만 좋은 만큼 밖으로 내어서 보이려고 하면 벙어리가 되어 버리는 기분.


굳이 비유하자면, 그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혼자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추상화나 현대 미술 같은 걸 감상하고 있는 기분일지도. 언젠가 보았던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 같은 느낌으로. 우아하고, 서정적이고, 한 편의 시 같고. 하지만 동시에 감정을 온통 휘저어놓아서, 북받쳐셔 괜히 나 스스로를 토닥거리고 마는. 내가 잘 덮고 숨겨놓았던 부드럽고 연약한 마음의 살점들이 드러나서, 세차고 가시돋힌 풍랑에 노출되는 느낌. 고통스러우면서, 거대함에 절망하면서, 그럼에도 스러져가는 것들이 아름다워서 눈을 떼지는 못하는, 모든 것이 안타깝고 애절하고 소중해서 못 견딜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 순간이 있어서 행복할 수도 있다고 믿는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기분.


숨쉬고 소리내어 읽고 글씨를 새기는 나를 궁극적으로 느끼고 있노라면, 그리고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선율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세상엔 역시 내가 아직 보거나 느끼지 못한, 발견하지 못한 거대함과, 웅장함과,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어디엔가 존재할 거라는 기대를 막연히 품게 된다. 나는 그것에 압도당하고 싶고, 감격하고 싶고, 그것을 한없이 사랑하고 싶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내 존재가 정당화되고, 가치있고, 충만해질 거라고 믿게 된다.


사실, 그것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실은 그것이 어디엔가는, 적어도 어쩌면 내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어디엔가는 존재한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기대를 품는 것만으로도, 모든 건 상당히 나아질 수 있다. 내가 아름답거나 멋지거나 훌륭한 그 모든 것들을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만족하는 것처럼. 단지 세상에 그런 것들도 있다는 것만 알아도 기쁜 것처럼.


하지만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변하지 못한다. 변화가, 만남이, 이별이 모두 두렵고 끔찍하다. 나는 접하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 내 껍질을 두텁게 만드는 데 바치고 만다. 이런 나는 역시 멜랑콜리를 즐기고 있다, 고 밖엔. 우울함조차 즐기는 사치스러운 나는 결국 진짜로 우울병에 걸릴 확률은 낮다. 나 스스로 딱히 그걸 문제시하지 않아서인지, 실질적으로 심하지 않아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냥, 미칠 듯이 우울한 나조차도 그저 내버려두는 법을 터득한 것 뿐일까. 주위에 내가 신경써야할 대상, 책임져야할 일들이 없다는 것도 상황이 심각해지지 않게 하는 요인들일지도. 사실 그런 것들이 있었더라도, 나는 쉽게 손에서 모든 걸 놓아버렸을 거란 생각도 들지만. 세상에 나 이외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유아적인 방어막을 단단히 껍데기로 두르고서.


그리고 나는 실제의 끝은 결국 두려워서, 무서워서 못 견디면서도, 그 끝이 가져다주는 비통함과 절절함을 상상하며, 쓰디 쓴 사탕을 입에서 굴려가며, 혼자만의 세계에서 우울함의 놀이를 한다. 찬란하고, 아름답고, 완벽하기만 한 그 끝에 대해, 언제까지고 상상한다. 슬픔의 환희라는 차디찬 구슬을 끌어안고, 거기에 빠져서 놓을 줄을 모른다.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들은, 마치 그리웠던 곳에 도달하는 것만 같아서, 더더욱 절박해진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엔, 내가 나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쁘다.

울음도 눈물도 자꾸만 벅차오르지만, 실은 기쁘다.

영원히 이렇게만 있고 싶다고 바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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