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金
뭐라도 하면 낫겠지라는 안일한 생각 한편으로, 반짝거리는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철딱서니 없는 기대도 함께 안고 글쓰기 모임이란 걸 가봤었다. 첫 시간은 자기소개. 마구 던져지는 다른 글감보다 너무 밋밋한 그 단어가 오히려 내 약점이란 걸 순식간에 깨달았다. 그나마 타인을 마주해야 내가 뭔지, ‘누군가’이기는 한지, 조금이라도 생각할 기회가 생긴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라는 더 구체적인 소재를 두고서도 나는 신호가 죽은 기계 마냥 머릿속에 잡음만 흘러갔다.
간신히 뭔가 하나 잡았다 싶으면 손 안에서 뭉크러졌다. 너무 낡고, 너무 바랬다. 달이니, 별이니하는 모든 자연물들은 나를 다시 유년기로 보내고 있었고, 감미롭다느니 푸르다느니 결이라느니 하는 추상적이고 희끄무레한 단어들은 전혀 지금의 내 중심을 관통하지 못했다. 백지의 난관이었다.
다만 그래도 이전에 그가 이력서의 자기소개를 작성할 때 그에게 ‘매뉴얼 읽는 남자’라는 힌트를 줬던 일례를 기억할만큼의 지혜는 남아서, 반대로 이번엔 그의 의견을 구하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타인이 보는 나만큼 정확한 게 또 있을까. 정작 나는 매일 거울을 봐도 모르는 것들이,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겐 오히려 뻔하디 뻔한 이야기. 내 한량 같은 생활과 일관된 취향을 여지껏 감내해 온 그의 답은 그야말로 누르자마자 튀어나오는 수준이었다.
‘요괴, 미스테리, 장르소설.’
눈 앞에, 아니 온 사방에 찾는 걸 두고서도 못 볼만큼 어쩌면 나는 너무 익숙해졌던가보다. 중2병 시절부터 음침한 구석만 찾아댔던 나는 서른이 넘도록 한 가지 맛만 고집하고 있다. 책도 추리 소설과 오컬트류, 영화나 만화조차 요괴며 SF류. 옛 원작 동화들의 괴팍한 마녀마냥 나는 온갖 음습한 것들을 수집하며 좋아라 한다. 물론 더 어릴 때만큼 티나게 4차원으로 굴지는 않지만, 여전히 고양이마냥 발소리 없이 다니며 누군가의 등 뒤에 서있는 것만으로 놀라게 하는 나는 섬뜩한 걸 매력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결국 내가 도달한 단어는 ‘기묘함’이었다. 더 근본적으론 ‘묘’하다였고. ‘묘’라는 단어 안에는 이미 고양이(猫고양이 묘)가 들어있고, 죽음(墓무덤 묘)이 있고, 별스럽다(妙묘할 묘)는 딱지도 붙어있다. 죽음에 관한 내 애정은 너무 많은 글들에 넓게 포진되어 있어서 더 부연할 필요도 없다. 물론 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실제로 묘지 산책을 좋아한다던가 하는 수준은 아니라는 걸까. 시체와 피가 일상인 영화와 소설과 게임을 즐기긴 해도, 현실에선 그저 식칼만 봐도 무섭고, 출산의 고통보다 무통 분만 주사가 더 무서웠던 소심쟁이라 집밖을 나서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다자이 오사무나 버지니아 울프 같은 행동파가 아니니 나는 안심해도 좋다고 할까. 반대로 한니발 렉터 같은 인물이 될까 싶어도 도무지 타인에 관심이 없으니 그것도 패스. 팀 버튼 류의 기괴함의 미학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그저 아마추어 호사가에 불과하다.
고양이에 관해서라면 나는 사실 이른바 고양이 붐이 일기 전의 좀 더 야생을 간직했던 녀석들을 좋아한다. 요즘 고양이들은 비둘기 같아서 싫다. 물론 그것이 인간 중심 세계에서 종족 보존에 유리한 길을 선택한 영리한 이들의 결말이라 해도. 순수성을 지키길 원하는 나는 비둘기가 닭이 되고 고양이가 비둘기가 되는 세상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SF적 진화와 변신에는 열광하면서도 이렇듯 동족 혐오의 편견을 가진 나는 어쩌면 묘하기 이전에 모순적인지도. 나 역시 집고양이로 길들여진지 오래이면서 말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먹이를 얻어먹고는 싶지만 인간 냄새를 묻히기는 싫은 고양이들과 나는 그리 다를 바 없을지도.
자연에도 도시에도 속하지 않는 그런 경계선 위의 길고양이들처럼 나 또한 유별나게 사회에서 어정쩡한 존재로 남아있다. 인간 관계에 서툰 것을 그저 외계인 핑계를 대며 발뺌하고, 늘상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서 위안을 찾으려는 헛된 소망을 품고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그들 자체로서 이해받고 사랑받는 이야기, 혹은 그들의 힘으로 인간의 오만함을 압도하고 힘을 전복시키는 이야기, 인간의 위선과 욕망이 낱낱이 까발려지고 단죄받는 이야기. 별종들을 위한 환상에만 젖어서, 늘 모험을 꿈꾸기만 하는 내가 그렇게까지 다른 존재일까. 나는 그저, ‘묘’하기를 바라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세상에서의 내 역할과 내 존재의 당위성이 정립되길 믿으며.
결과적으로 글쓰기 모임의 자기 소개글은 엉뚱하게 흘러가서 조약돌이 가라앉는 호수에 이르렀다. 그것이 얼마나 묘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모임에서는 조금 별난 것이었던가보다. 사람들의 애매한 반응에 나는 또 혼자 가시만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불편한 지압 방석에 앉아 들썩거렸다. 그 호수의 이미지답게 나는 은둔자 생활을 벗어나겠다고 간 자리에서 내가 초고수 은둔형 인간임을 선포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꼭꼭 숨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정작 나는 나에 대한 그 묘사(描모뜰 묘)가 마음에 들어서, 한동안 고이 간직했다가, 결국 먼 바다(淼물 아득할 묘)로 향하는 물길을 찾아내고는 이렇게 때때로 구깃구깃하고 기묘한 종이배들을 슬며시 띄워보낸다. 그것들이 일부는 가라앉고 일부는 살아남아 어디로 가닿는지 행방이 묘연하다(杳아득할 묘)해도, 나 대신 그 배들이 세상으로 향한다는 게 나에겐 가장 큰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