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金
초록의 나무들 아래에 서면, 마음은 특정한 빛, 특정한 온도, 특정한 음을 머금는다.
사르락대는 나뭇잎들에 튕겨나온 햇살이 마음에 묻어, 물고기 비늘처럼 은근하고 반짝거리는 빛깔이 된다. 버터처럼 녹작지근하게 녹은 따뜻한 피가 온몸을 휘돌아서, 지난 자리자리마다 도리어 서늘히 깨버린다. 바람에 간지럽혀진 나무들과 똑같이 웃음이 차오르다가, 웃음은 숨이 되고, 숨은 진동이 되고, 몸의 중심에서 퍼진 그 잔잔한 물결은 화음이 된다.
섬세하게 조율된 그 마음 한 덩이를 속에 품고 걷노라면, 점차 등이 서고, 어깨가 펴고, 시선이 맑아진다. 머리에 관을 쓰고 콧대를 높이며 당당하고 우아하게 걷던 옛 귀인들이 꼭 그랬을 것 같다.
그것은 기이한 일이다. 잘한 것도 없고, 누군가의 찬사도 없고, 하물며 기막히게 맛난 것을 먹은 것도 아닌데. 마음은 쉼없이 초록을 펌프질 해 내 주름진 영혼 구석구석을 팽팽히 부풀리고 말끔히 펴놓는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당위 그 자체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이 형상에 떨리듯 맺혀있다는 것만으로 충만한,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열매.
어느 날인가에는 반드시 그곳에 가야만 한다. 초록의 나무들 아래로.
생의 비바람에 푹석 젖어 옛 방망이에 두들겨 맞은 빨래 모양을 한 채로는, 걸을 수 없어도 기어가야 한다. 울음 가득한 몸이 질척이며 땅에 들러붙어도 생살을 떼어내듯 악을 쓰며 가야한다. 꿈틀대는 거머리처럼 수많은 혀, 혀, 눈알, 눈알, 이빨, 이빨들이 사방에서 득달같이 몰려들더라도, 사지를 버둥대 내치며 헤쳐가야 한다. 악몽 같은 그림자들이 머리를 으깨버릴듯 조여오더라도, 뇌가 새하얗게 녹는 감각으로 찢어발기며 앞으로 나가야 한다. 괴물과 마녀와 현자를 시커멓게 태우고 아기와 소녀와 청년을 왈칵 집어삼키는 지글지글한 화염과 용암이 스멀스멀 뒤를 쫓더라도,
나는 나다.
나는 나다.
나는 다만, 그저, 오롯이,
그 어느 것도 아닌 나다.
중얼중얼 숨차게 외며 바득바득 뿌리라도 넝쿨이라도 잡고 당겨 가야한다.
은빛 먼지와 재의 냄새를 맡고서야, 안도하듯 힘이 빠진다.
부석부석거리는 흙 사이로 이끼와 잡초가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걱정해주는걸까, 텁텁한 혼잣말을 뱉으며 손을 뻗어 그 초록의 머리들을 쓰다듬으면 부드럽고 촉촉한 위안이 스민다. 금세 그런 적 없다는 듯 삐죽거리고 종알대며 저들끼리 이슬을 던지고 놀기 바쁘지만.
그러다 흐느끼듯 울음이 터지면, 그것도 그대로 좋겠지.
푸석한 흙과 보드라운 이끼와 순한 조약돌과 까끌한 바위와 그 틈새들을 가득 메운 투명하고 미세한 무한의 씨앗들 위로, 소금기 어린 눈물이 콸콸 쏟아져 상처를 헤집고 그 따가움에 둑이 더 터질지언정 도무지 멈추지는 않아서, 사방을 적시고 줄기처럼 뻗어서 넘실대며 차올라 끝간데 없는 바다가 되어, 속으로 속으로 푸르게 잠겨가면 동글동글 반짝였던 모든 씨앗들이 일시에 깨어나 형형색색의 물고기들로 피어나고, 그 작은 입들로 가만가만히 너덜거리는 몸뚱이에서 썩은 살을 깎아내면, 수정같고 공기방울 같은 영혼이 마침내 수면 위로 둥실 떠올라,
일렁일렁 물결과 파도에 실려 결국 어느 날인가에는, 그곳에 닿겠지.
초록의 나무들 아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