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金
가끔은 피워본 적도 없는 담배가 땡긴다. 한 손으로 불을 피우는 능력에 매료되는걸까, 아니면 구강기적 습관을 어른스럽게 소화해내는 게 부러운걸까. 속에 게워내고 싶은 것들을 한 번 태우고 연기라는 물질적인 요소로 변화시켜 내보낼 수 있다는 점에 끌리는 걸지도 모른다. 다만 무언가 해야할 것만 같은데 딱히 손에 잡히지는 않을 때, 안정적으로 귀환할 수 있는 습관이라는 점이 날 아쉽게 만든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그런 무위의 시간에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곤 펜과 종이, 끄적끄적 지저분한 글씨더미일 뿐이니까. 그닥 멋이 없는 느낌. 뭐, 지저분한 걸로 치자면 사실 담배 쪽이 더 엉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역시 난 조금 더러운 편을 선호하는지도.
하지만 애초에 사람들이 끌려하는 성향도 다 그런 느낌 아닌가. 레트로, 빈티지, 생활감이라는 단어. 낡고 닳고 시간의 흐름이 잘 첨가된. 적당히 먼지가 묻어서 불고 털면 반가운 것이 나타나는 그런 순간들. 나를 묶지 않고, 죄지 않고, 내 몸에 맞게 흐르듯 늘어지는 옷 같은 것. 물론 난 이제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 타고 남은 재와 먼지의 흔적에 이끌려가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 숮더미 속에서 뭘 보는 걸까.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은 호빗들과 여행하다 엘프(요정)의 음식인 렘바스를 접하고 아주 간단히 평한다. “먼지와 재(dust and ashes)”라고. 장례식에서도 들을 수 있는 그 문구.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겐 그걸 입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리면 감미로운 느낌이 든다. 내 음울한 성정이 반영된건가 싶지만, 물론 나조차도 달에 한 번 할까 말까한 청소를 하며 입과 콧속으로 들어오는 먼지의 맛을 요정의 정수처럼 느낀다는 건 아니다. 그저, 나는 그 단어들이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와 개념을 사랑하는 것뿐일테다. 은근하면서도 진하게 타오르는 불, 그 열기가 식은 후에 남은 한낱 바람에 흩어질 가볍디 가벼운 것들. 연기와 재와 먼지.
나는 늘 그래왔다. 가장 아름다운 눈망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살포시 감은 눈. 오직 새파란 추위 속에서만 나타나는 누군가의 따뜻한 마지막 숨결. 빛과 열로 쪼글쪼글 말라버린 뒤에야 물속에서 웅크린 몸을 뉘이고 향과 맛을 풀어내는 찻잎. 도서관의 가장 구석에서 누렇게 바래버린 비밀 같은 낡은 책. 바람이 끝없이 쓰고 지우는 사막의 모래 낙서장. 빗방울이 낙하해 깨지기 직전 찰나의 반짝임. 가장 외로운 날에 내 곁에 함께 걸어가는 내 그림자. 모두가 빛과 젊음과 요동치는 삶의 심장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찬양할 때, 나는 언제나 사그러들어가는 것, 애잔히 흩어지는 것,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내 안에는 선명히 남는 그것들만을 사랑했다.
삶과 타인들의 강요에 못 이겨 내가 아끼는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들에도 ‘먼지와 재’는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나는 내가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버려야 할 때마다 죄책감 비슷한 걸 가졌었다. 게으름일지 무지일지 어느 탓이 큰지 모르지만 집에서 기르던 식물을 말라죽이고 버리면서도 속으론 생각했다. 와, 식물 살해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난 이미 늘 뭔가를 버리고 소모하고 죽이는 생명체다. 그리고 결국엔 나도 쓰레기로, 재로, 버려지고 잊혀질 것이다. 아무리 미사여구로 치장하고 보드라운 수의를 입힌들, 울 사람이 있을지조차 모르겠고 그 눈물마저 쉬이 말라버릴 것이고, 나는 마침내 그토록 갈망하던 망각의 대해로 녹아 없어질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 역시 죽어 먼지와 재로 화할 존재라는 게, 그 모든 것들, 내가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는 그 모든 것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이유인 것만 같다. 그래서 어쩐지, 몹시 안심이 된다.
사람들은 실은 무의식으론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영원하지 않은 순간과 찰나의 모든 반짝임들이, 먼지와 재 속에 남은 희미한 온기가, 자글자글한 주름과 손 때 묻은 자국들이, 모두 죽음의 가장 다정한 미소라는 것을. 먼저 가버린 이들이 약속하는, 서러운 울음 끝에 오는 안온한 죽음의 포옹이라는 것을. 그러니 어쩌면 담배를 핀다는 건, 가장 낭만적으로는 죽음의 입맞춤을 받고 있는 것일지도. 비록 나는, 죽음과 하는 것이라 해도 그런 질척한 스킨십은 이제 질색이라 어쩔 수 없지만. 나는 그저, 내 몸에 구멍을 내지 않는 선에서 죽음과의 밀당을 즐기며 하루하루, 먼지와 재가 될 날을 얌전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