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 土
결혼식을 올린 지 한 달. 함께 산 지는 네 달 하고 열 하루.
그러고 나서야 오늘이 왔다. 혼자 여유로울 수 있는 시간. 밀린 일도, 걱정할 일도, 성가신 사람도 없는, 조용하고 안정적인 새로운 공간에서. 서른이 된 것을 스스로 축하하고, 감격하며, 뿌듯해하고, 만족스러워 한다. 다만 과연 그 나이가, 그 숫자가 모든 걸 보장해준 것인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그저 내 운명, 내 삶에 한해서는 그 숫자가 상징적이라고 해두자. 실제로는 스물 아홉이고, 만으로는 여덟이어도, 그냥 심리적으로는, 그리고 우리나라 기준 상으로는 서른이라고 퉁 쳐주자.
실은 모든 과업을 잘 밟아와서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이상적이라고, 일반적이고, 정상적이라고까지 못 박고 싶어하는 그 심심할 정도의 과정들 말이다. 다만 그걸 경험해 본 이들은 아는 것 같다. 그게 얼마나 심각하게 어려운 과정인지를. 얼마나 골 때리게 귀찮고 복잡한 과정인지를. 또 얼마나, 얼마나 수많은 내-외면의 변화를 요구하는지를.
다만 그 모든 걸 넘고 나면, 오늘이 온다. 내가 열망하던, 온 마음을 다해 그리던 그 시간이. 홀로 충만할 수 있는 시간이. 그러니까 나는 그 누구보다 운이 좋고, 그 누구보다 행복하며, 그리고 이 모든 걸 누릴 만한 자격이 있다.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만큼 속이 영글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까지 오면서 참 많은 걸 버리고 깎아냈으니까.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른다. 최근 내 맘을 물들이는 것은 오묘한 식물들, 아니, 식물들의 오묘함이랄까. 온통 초록빛에 반들거리고 생생하게 뻗어있는 모습하며, 하루하루 숨죽인 듯 고요하게 머금고 있을 뿐이지만, 순식간에 웃자라 있는 그 모든 느낌이, 가슴 벅찰 만큼 좋달까. 그렇게 정적인 모습 안에 생이 가득하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아서, 늘 신기해서 그럴까. 아무튼 전엔 뭔가를 살아있게 만드는 데엔 내가 전혀 소질이 없을 거라고 믿었다면, 그런 믿음을 부정하고 내게 손을 뻗어주는 것만 같아서, 또 반해버린 모양이다. 요리를 하는 것도 제법 취향에 맞는 걸 보면, 나는 결국 다른 모든 딸들처럼 거부하면서도 엄마를 닮아갈 수밖에 없나 싶다. 물론 그래도, 그 길에서 조금은 더 삐져나오고 싶지만.
셋째 이모가 작년 8월에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혼란과 슬픔은 아주 잠깐. 그리고 다시 무뎌졌다. 이것도 서른의 마음이라 그렇다고 생각해본다. 누군가가 나를 상처와 충격에서 보호해야 할만큼 어리던 시절은 이제 아주 가버린 거다. 차를 새로 사면, 묘에 가서 인사해야지. 그 정도로 충분한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거라서, 그거라도 해야지, 그렇게 마음에 매듭을 지었다. 아주 잠시 울었다. 모든 사람들이, 죽어버린 사람까지도, 잔인해서, 가여워서, 미어지도록 비참해서. 그건 뭐랄까, 나에게 소중했던 누군가를 잃은 슬픔이라기보다, 그저 그 모든 현상 자체, 그 이야기 하나에서 오는 아픔일 뿐이었다. 그 안에 엮인 개별 인간 하나하나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그 모든 이유들을 헤아리면서 느끼는 아득함. 누구도 미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대신 이모를 놓아버리기 전을 떠올렸다. 내 삶에서 점점 유령처럼 희미해져 가기 전의 기억들. 그 모든 기억들의 태초까지 거슬러서, 아아, 메리가 남았구나, 라고 결론지어 버렸다. 참으로 나다우면서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이모조차 저세상에서 조금 기가 막혀 할 그런 결론. 아주 비싼 (아마도. 알 수 없지만) 휴지 덮개 천에서 떼어준 코알라 인형. 세월에 바랜 것인지 구분이 불가능한 잿빛 털을 가진 인형을, 이모가 내게 남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니. 이렇게 보면 나는 아직 어린 것일까.
하지만 그 기억만으로 나는 확신하는 거다. 이모는 내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뭐든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그렇게도 나를 아껴주었던 거라고. 다만 사라지기 직전, 이모는 혼란에 빠져 버렸던 거다. 내가 이모에게 뭘 바라는지 알 수 없어져서, 그래서 내게 0이 너무 많이 붙은 선물들을 자꾸 안겨주려 했던 거다. 그 물건들은, 0이 붙은 만큼 정말이지 공허했는데.
생각해보면 기묘한 일.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사람과 나 사이에 인형 하나씩.
마치 그 사람과 나 사이에서 인형이 대사나 통역사라도 되는 양. 나는 그렇게나 ‘생(raw) 사람’이 무서운 것일까. 혹은 ‘생 관계’?
그보다… 인형이 가장, 비현실적이고, 계산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고, 가장 순수하게 쓸데없는(?!) 선물이어서 그럴거다. 그리고 그 사람 대신, 그 사람을 떠올리며, 애정을 줄 수 있는 대상이어서.
그래서, 그러니까, 메리가 남았다.
어쩌면 이야기를 시작할, 아니, 이어가고 마무리 지을 준비가 되었는지도.
더 이상 쓰면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나아갈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