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조약돌 셋 28화

타인 알레르기

토 土

by 하이디 준

자유를 얻자고 첫 페이지부터 가득 낙서를 해놓았으면서, 정작 여기까지의 기록은 온통 고통과 고뇌에 지친 자의 비루함, 비참함 뿐이다. 실제로는 그저 단 하루, 어떤 순간, 아주 작은 한 마디에 불과할텐데도. 나는 이렇게밖에는 나를 치유할 방법을 알지 못해서, 씁쓸하고 따갑고 성가신 모든 것들은 죄다 여기에 몰려 있는거다. 이 종이들은 내 전용 화장지, 휴지들이고, 나는 펜으로 꽤나 정성스레 ‘배설’을 하고 있으며, 그렇게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나를 비워내고서야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두 달 전의 기록은 내 오늘의 심정과 별 다를 바가 없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우습게도 너무나 오늘의 심사를 소상히 짚어내는 내 자신의 글에 도리어 위로를 받는 기묘한 상황. 오늘의 일도 깡그리 잊어버리길. 다 게워내고, 그리고 지워버리길.


나는 아마도 ‘타인 알레르기’ 혹은 좀 더 심각하게 ‘타인 거부 반응’ 같은 거라도 앓고 있는 모양이다. “모두가 내게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라고 강요해. 그런 다음 은혜도 모르는 년이라고 욕하지.” 언제나, 언제나 같은 이유. 내가 절망하고 화내고 서러워하고 억울해하는 유일한 이유. 자꾸만, 내 좁디 좁은 경계조차 넘어오려고 하는 몇 되지도 않는 한 줌의 타인들때문에. 나는 인간이어서는 안 되었나. 아니면 좀 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고통을 맛 봤어야 이런 호사스러운 정신병 따위 걸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마치, 돈으로 나를 살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만 같다. “네가 욕심이 있든 없든, 네가 타인의 삶에 관여하고 싶어하든 아니든, 그런 것따위 신경쓰지 않으니까. 모두가 원래 그러니까 너도 당연히 욕망해야 하고, 이 지옥과 올가미에 속해 있어야 하고. 아아, 절대 혜택만 누릴 수 없지. 너만 자유로운 꼴은 볼 수가 없어. 함께 괴로워야 해.”


차라리 뻔뻔하게 그런 말이라도 내뱉는다면. ‘희생, 가족, 의무.’ 그런 단어들로 자신들을 치장하고 나를 ‘배려’한다고 말하는 위선은 더욱 끔찍할 뿐. 세상엔 나 같은 사람이 그렇게나 적은 걸까. 아니면 저런 해괴한 위선자들의 목소리가 더 커서, 나 같은 건 늘 혼자인양 느끼게 만드는 걸까. 나는 모든 ‘원래 그래야만 한다’는 명제와 상태와 존재들에게 피가 거꾸로 솟도록 반발한다. 모두를, 그 모든 것들을 짐승처럼 베어물고 짓씹고 깨부수고 싶다. ‘인간이라면 응당’이라는 말에는 짐승이 될 수밖에.


다만 누군가를 사랑할 뿐이다. 왜 거기에 대가를 지불하라고 하지? 왜 단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여럿에게 나누라고 강요하지? 거기엔 그 어떤 당위도 없다. 오로지 욕심. 끝없는 욕망. 스스로를 만족시키거나 스스로를 치유할 줄 모르는 자들의 한없는 비명.


혼자 내버려두라는데, 그걸 원할리가 없다고 말한다. 내 소망이 소망일 수 없다고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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