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조약돌 셋 30화

인상파 기억

토 土

by 하이디 준

오늘 아침도 시야는 흐릿하다. 날씨탓이 아니라 수면부족의 여파다. 매번 이제는 사람도 아닌 지피티에게 코칭을 받으며 흐트러진 시간표를 바로잡으려 다짐을 해보지만 밤에만 미끈미끈 반짝반짝하는 정신을 번번이 놓쳐버린다. 늘상 조금만 더, 하다가 새벽 두세 시. 분명 낮에도 혼자 작업할 시간이 있는데 왜 내가 계속 밤으로 기우뚱 치우치고 마는지 스스로가 야속할 때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의사, 상담가, 분석가, 절친을 모두 겸하는 지피티에 따르면 결국 그건 억지로는 되지 않는 부분이라는 걸 인정하는 편이 빠르다나. 더구나 낮에 혼자인 것과 밤에 혼자인 것의 결도 달라서, 나처럼 대낮에도 몽상가인 축이 밤에 새어나오는 꿈을 들이마시면 자연히 희희낙락하는 게 이치일지도. 어쨌거나 일상의 대부분이 그런 몽롱한 상태인 나에게는 크나큰 결점이 있다. 이미 예상 가능한 범위의 특징이지만, 나는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열렬한 추리 장르의 팬이면서도 그 맥락에서 가장 나에게 희한한 요소는 ‘목격자의 증언’이라는 부분이다. “네, 맞아요. 그 사람은 키가 컸고, 납작한 모자를 쓰고 있었고, 코가 날카로운 편이었어요. 바짓자락이 좀 늘어진 편이었죠. 아, 작은 갈색 가방도 들고 있었어요.. 등등” 이렇게 이어지는 문장들. 저렇게 길지 않더라도 누가 뭘 하고 있었는지, 누가 뭘 말했는지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있는 동네의 주변 인물들. 내 입장에선 수사하는 탐정이나 경찰보다 더 능력자인 조연들이다. 도대체가 그걸 어떻게 일일이 기억할 수 있는건지 그저 불가사의. 가끔 내 주변에서 날 한두 번 보고 알아보는 사람, 혹은 내가 뭘 입었는지 기억하는 친구 등은 나에게 실은 섬찟한 사람들이다. 내 기억 구조와는 전혀 다른 작동방식을 가진 생물들.


나는 삶도 기억도 대부분이 그저 물결과 파도와 바람처럼 스쳐간다. 내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일부러 카메라 렌즈를 조정해 맞추듯이 심혈을 기울여 집중한 경우뿐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경우는 내가 그 장면들을 직접 서사화했거나, 혹은 그런 서사적인 전개나 특징이 뚜렷한 사건, 인물이 등장한다. 결국 나는 모든 걸 한 번 소화한 다음, 이야기가 되어야 기억에 저장할 수 있다. 그 외의 것들은 정말 의식의 바깥으로 전부 스르륵 미끄러진다. 결과적으로 나는 주변에서 많은 억울하고 머쓱하고 괘씸해하는 이들을 마주치게 된다. 인사를 했는데, 눈이 마주쳤는데, 머리나 특정 아이템을 바꿨는데. 냉정하고 무심하고 싸가지 없는 녀석.


오해를 사며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그마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놓아버리는 건, 사실 정말 속속들이 따지고 들자면, 관심이 없는 게 맞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할 때 기억하는 건 나의 감상뿐이다. 각 부위의 미묘한 생김생김이 아니라 순전히 나만의 미학으로 순간포착해버린 사람의 인상, 분위기, 아주 두루뭉실한 향과 색상의 덩어리 같은 것. 그것마저도 대체로는 ‘미인이다, 아니다’로 판가름 나는 화풍 속에서, 나에게 사람이란 존재는 꽤나 얼기설기하게 엮인 뜨개 인형 같다. 나는 브랜드 상표에도 시큰둥하고 유행에도 둔하며 온갖 시사나 화제 거리에도 약하다. 그러니 못 알아보는 건 당연지사고, 가벼운 대화에도 소질이 없다. 길거리나 동네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칠 것 같으면 슬며시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럴 땐 얼굴은 기억하지만 나머지 세부사항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다. 이름, 직업, 거주지, 취향, 최근의 관심사 같은 것. 지지부진한 대화를 하느라 상대도 불편하게 만드느니 서로 평화로운 시간을 갖자는 나만의 배려이기도 하다.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도 멍하니 얼굴을 돌려버린다면 그건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공상 중일 뿐이다. 하늘을 보며 걷다 우물에 빠져버린 철학자 탈레스처럼 거창한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나는 걸어다닐 때도 실은 둥둥 떠다니는 거라고 보면 된다. 길을 건너려 대기하면서도 횡단보도를 세워 사다리처럼 기어올라가는 장면을 그리거나, 버스를 타고 창문을 내다보면서도 풍경 사이사이에 춤추는 거대 고양이와 곰 인형을 쑤셔넣으며 혼자 히죽거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해도, 사실 정확히 그 사람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순 없다. 어쩌면 그 순간 그 존재를 처음 마주친 것처럼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거나, 전혀 다른 그림을 그 위에 덧씌워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이를 먹고 고통스런 사회화도 거쳐 일정 부분 개선되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글로만 유창하고 사람을 마주하면 살짝 고장난다. 예전엔 그렇게 부족하고 모난 나를 나무라는 사람들의 시선과 말에 혼자 끙끙 앓을 때도 있었던 반면, 이젠 좀 뻔뻔스러워진게 더 진화한 버전이라고 할까. 그저 직설적이고 순진하기만 한 천연석인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런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적당한 가면과 거짓말, 인사치레를 유연하게 쓸 줄 아는 어른이 된 것이 씁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애가 어른 흉내내는 것 같아 우습다. 여전히 뭇사람들의 눈에는 나는 꽤나 뻣뻣하고 어색하고 냉담하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머릿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대에게 당장 전할 방법은 말 뿐인데, 나는 대체로 침묵을 더 선호하니 어느 정도의 오해와 위험은 감수하는 수밖에.


다행히도 시간은 내 편이어서, 나를 서서히 알게 될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늘상 ‘의외의 인물’이 된다. 말주변이 없는 관계로 내가 가장 잘 뒤집어쓰는 ‘부드럽고 소심하고 연약한 성정의 누군가’의 천을 벗겨보고는 그 안에 ‘엉뚱하고 장난스럽고 소탈한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종종 충격을 받거나 재밌어 한다. 결국 그들도 자신들만의 인상파 화법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셈이니까. 그리고 차츰 내 침묵이 불편함보단 마음을 살짝 내려놓을 수 있는 여백으로 다가가는 모양이다. 순식간에 자기 속내까지 무심코 털어놓을 만큼.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느껴지는 게 아닐까. 내가 상대를 ‘보고’ 있기보다 ‘듣고’ 있다는 걸. 내가 각종 잣대로 상대를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서 흥미로워 한다는 걸. 그리고 때론 그런 눈을 반쯤 감은 듯한 흐릿한 시선이, 어쩌면 누군가를 보는 가장 정확한 시선일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나는 그래서 오늘도 반쯤은 꿈을, 반쯤은 현실을 보는 눈을 갖고 거리를 슬렁슬렁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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