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 土
간혹, 부모님이 점점 어려진다는 느낌을 순간적으로 받는 때가 최근 들어 생기곤 한다. 아이처럼, 우리의 서로 간의 역할이 뒤바뀐 것처럼, 내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내 부모. 묘하게 낯설고 당혹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이게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는, 이상한 재발견에 우습기도 하다. 나에겐 언제나 그토록 비판과 제한과 비관적인 시선을 던져왔던 사람들이, 정작 나에게선 긍정과 위로와 위안을 찾고 싶어한다니. 나는 서글프면서도 그냥 이런 편이 차라리 좋겠거니 하고 스스로 다독이고 만다.
아버지가 아팠다. 작은 혹 같은 암. 간단히 떼어내는 수술이라 했지만 꼬박 나흘을 금식해야 했고, 지킬 이도 없고, 병든 이도 많지 않은 적막한 병실에 하릴 없이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엄마는 늘 그렇듯 냉정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스스로의 상처만 되짚기에 바빴다. 뭐, 그럴만도 했지만. 그러니까 엄마는 그냥 그렇게 두어도 되지만, 나는 딸이니까. 보호자로 싸인하는 순간엔 묘한 기분이 들었고, 아마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는지 어떤지, 그저 점점 아득한 얼굴이 되었나보다.
아주 조금은 내가 가진 나쁜 생각들 때문에 또 벌을 받았나 하는 죄책감이 솟아올랐지만, 금세 오기가 생겨서, 제길, 생각만으로 벌 받는다면 세상 모든 인간이 죄다 불행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져야 마땅하다고 선언하고는, 스스로를 토닥거린 뒤 약해져선 안 된다고 좀 더 힘을 냈다. 더구나, 각자의 몸에 벌어진 일은 결국 오롯이 자기 책임일 뿐이다. 사고와 유전의 항목을 제외한다면, 결국 노년에 받는 내 몸의 성적표는 내가 살아온 결과다. 내가 나에게 무엇을 선택해줬고, 무엇을 먹였고, 무엇을 안 했는지의 적나라한 증거. 스트레스와 환경 조건, 어쩌면 돈 역시 달아날 수 없는 제약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 작은 틈새에서조차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선택들을 한다. 그러니 핑계거리는 줄어든다. 무엇보다 내 아버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대부분 살았다는 걸 엄마에게 귀 따갑도록 들은 처지에,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나를 발견한다.
중재자의 노릇은 관두겠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나는 아버지와 엄마에게서 독립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오래 걸린 것 같다. 나 역시 그들의 영향력을 쉬이 떨쳐내지 못하고, 그들의 유산 중 어떤 부분이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만 하는지 구분해내는데 한참 걸렸으니까. 유산이라고 하면 다들 돈과 물질밖에 떠올리지 않지만, 내 경우엔 언제나 감정적 유산이 더 문제가 됐다. 반면 부모님과 내 관계는 실상 따진다면, 오히려 돈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남들처럼 결핍에 매달려 있는 거다. 부재했거나 모자랐던 감정적 유산에 대해. 혹은 넘치도록 많은 지독한 기억들에 대해. 그러니 나는 그들이 나에게 가르치지 않은 것을 도리어 이제 와서 그들이 나에게 기대한다는 걸, 황당하면서도 어쩌면 결국 그들도 별반 다름없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로 인정하는 거다.
사실 그 모자라는 감정적 유산, ‘정’이라는 재화가 부족한 덕분에 부모님과 내 사이는 ‘쿨하다’. 그런 끈적거림이 없는 것이 나에게 맞아서 좋고 편한지, 혹은 애초에 내가 그렇게 길러져서 내가 그것을 편하게 인식하게 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래서 모든 애증의 세월을 지나, 어려지는 부모 앞에서 나는 여전히 그들의 어린 딸을 연기한다. 그들의 허물을 모르고, 그들의 말을 의심없이 삼키고, 그들 앞에서 종종 재롱을 떠는. 그리고 나는 그들이 주는 물질 이상으로, 지금의 평화를 사랑한다. 오로지 서로 간에 충분한 거리가 있어야만 가능했던 그 안식을.
장례식을 다닐 일이 많아진 나이의 엄마에게서, 친구들끼리 ‘고아가 되었다’는 말을 주고받았단 얘길 들었다. 손주들을 둔 나이의 사람들이 ‘고아’라는 표현을 쓴다는 게 묘했지만, 결혼을 하고 보면 친정이 사라진다는 느낌이 어떨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아진다. 아이를 낳고 보면 부모로서 할 수 있었던 것과 할 수 없었던 것들의 간극도 짐작하기 쉬워진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더듬어본다. 과연 내가 ‘고아’가 될 순간에, 나는 정말 담담히 후회 한 자락 없을까. 내가 흘릴 눈물은 어떤 무게일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내 작은 마음 속의 선택들이, 이별 앞에서 나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