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水
영상에 질리고, 게으름에도 지쳐서, 다시 책을 들어본다. 나무와 숲과, 흙과 바람이 모두 그리워서 마음 속이 푸석푸석 메말랐다. 손에 쥐면 바스라져서 사이사이로 모두 빠져버리고, 먼지처럼 흩날려버릴 것 같다. 이 기묘한 감금 생활, 안락하고도 나른한, 나를 망가뜨리는 나락. 그리고 결국에 돌아올 곳은 여기. 종이와 펜, 그 사이의 자욱자욱 남겨지는 글, 문장, 언어.
내가 바라는 곳에 나를 데려다 놓을 기운도, 자원도, 방도도 없어서, 늘상 하는 대리만족은 이런 것들뿐. 그래도 그나마 가장 평온한 만족감을 주는 건 이렇게 쓰고, 상상하는 행위뿐. 아마 내일부터는 그림도 그릴지도. 색감. 초록, 연두, 갈빛.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흘러드는 미풍의 색. 그런 걸 칠하고 있으면 그리움이 조금 사그러들지도. 창가의 하늘과 구름조차 내가 아는 빛깔이 아닌 건 너무 서운해서, 그것마저 그려야 할지도.
아… 그 눈에 선한 풍경 위에 퐁퐁 튀는 까치와, 슬렁슬렁 걸어다니는 산고양이들까지 얹기 시작하면, 어쩐지 울컥할 정도라 서둘러 지워야 한다. 하하. 고작 차로 빠르면 30분, 길면 1시간 반 정도 거리의 그곳이 고향인 나는, 왜 옛날 시인들마냥 향수를 노래하고 있을까. 그 옛날 시인들의 고향처럼 푸르고 너른 땅도 아니건만. 그저 내게 친숙한 그 자그마한 녹지가 나에게 이토록 중요한 것일줄은 몰랐다. 그마만한 풀밭과 그 정도 키의 나무들쯤, 당연히 있는 줄로 여겼지. 항상 그런 풍경만 보고 살 줄 알았더랬지.
오로지 건물만, 네모나고, 네모나고, 선, 선, 각, 각뿐인 광경을 매일 마주하노라면,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몸이 절로 무겁디 무거워진다. 가능하다면 거대한 굴착기로 죄다 밀어버리고 싶어진다. 그 안에 개미처럼 가득할 인간들까지 모두 기화해버렸음 싶다. 내게 먹을거리를 배달해주고 만들어주는 이들도 존재한다는 사실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채로 말이다. 그런 이들조차 전부 기계와 로봇으로 바뀌어버렸으면 하는 반인류적 소망. 그저 다른 이들이 내 눈에 들지 않고, 나 역시 그들의 눈에 비칠 일 없는 초록의 땅에서, 매일 거닐며 햇볕을 쬐고 나무 냄새를 맡고 바람에 씻기고 싶다.
이 도시의 사막에선 도저히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