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水
어느 날 문득 샤워를 하다 보니, 뒷머리가 단단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엔 마치 내가 흙인형이 맞는 양, 그곳의 점토만 덜 마른 것처럼 무른 부분이 분명 있었는데, 요 한 두 해 사이에 그게 거짓말처럼 사라진거다.
묘하게, 뭔가 끝나고, 닫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신체는 이제 성장을 멈춰버렸구나, 같은. 그와 함께 내 반짝이는 무언가도 증발해버렸을까, 하고 유치하게 떠올렸다가, 정말 어른이 되어버린 것인지, 굳어버린 것인지, 별 감흥 없이 아, 그러라지 뭐, 해버렸다. 애초에 그런 반짝임이 있기나 했을까.
반대로 아, 더는 흔들릴 일이 없겠구나, 싶기도 했다. 마치 그 불투명한 숨구멍으로 내 감정의 호흡이 들락거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고전일지 미신일지에 적힌 것처럼 그 곳으로 더 높은 차원의 존재와 소통한 것도 아니면서.
내 육신은 이제 늙어갈 일만 남은 거라면, 내 정신도 마찬가지인걸까. 성장의 여지가 사라져버렸을까. 예전보다 더 편협해졌을지도. 사람들도 만나지 않으니 더 이기적이 됐을지도. TV에 나오는 배우가 내 기대보다 아름답지 않아서 불평하는 나는 예전 그대로인걸까, 늙어가는걸까.
그래. 어제 갑자기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서, 또 목소리를 드높이고 싶은 환상에 빠져서 잠을 못 이뤘더랬다. 늘 하는, 샤워실의 공상, 침대 속의 몽상. 현실로 이뤄질 일 없는, 겉멋만 잔뜩 든 노친네의 환상. 그 불평이란 것조차도, 소리내어 말하고 싶은 것조차도, 인간들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 데에 분개하고 있는 거였다. 아마 그걸 너무 잘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들의 잣대로는 엄연히 비현실적인 나는 결국 그래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고, 바꾸지도 못하는 것일테지만.
아직 잠결에 헤매는 아침에도 나는 그 모든 거지 같은 이론들을 내 지혜라 여기며 붙들고, 선포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두 발로 걸으며, 뿌연 햇빛이나마 쬐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끔히 놓아버렸다. 그럼에도… 지금 끄적이는 것은 찌꺼기의 흔적이겠지. 이것마저 털어버리고 나면, 다시 가장 행복한 바보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테다.
어쩌면, 머리도 굳고, 마음도 진짜 돌덩이가 된 건가 싶을 때도 있다. 현실의 인간들과 인간사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서, 왜 영화나 만화를 보고 울 수 있는지는 여태 잘 몰랐는데, 그건 내가 현실에서 누군가를 마주할 때마다 전투 태세에 있기 때문인 걸 겨우 깨달았다. 현실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건, 내가 스스로 그 모든 쓰나미, 해일을 철저히 막아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나는 환상에는 아주 무르고, 아주 자비로워서, 실낱만큼만 흘러들어와도 주룩주룩 울어버리는 거다. 그건 실제가 아닌 걸 아니까. 아파도 뭔가, 상처가 남을 것 같지 않으니까. 묘하게 변태 같은, 마음과 감정의 SM 플레이.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 내가, 현실을 바꾸려 들리도 없고, 벗어나려 들리도 없다.
불만. 불평. 거슬리는 무언가.
욱하고 올라오는 덩어리.
그게 현실을 굴러가게 하는 나사, 태엽, 기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계속 가지고 있고 싶지는 않은 것.
그냥 이렇게 쭉, 편한 바보가 되어버리고 싶은 것.
아아, 부디 내 환상을 침범하지 말아주길.
그곳마저 오염되어 가면 나는 더 이상…
바보로 지낼 수 없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