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의 유무를 떠나 우리 모두 존중받아 마땅해
대학 때 담배꽁초를 페트병에 탑처럼 쌓아두고 하루 종일 과방에 역한 냄새를 풍겨대던 예비역 선배들을 증오했던 적이 있다. 너무나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버렸어도 여전히 선명히 기억나는 그 촌스럽고 센스 없는 초록색 페트병. 그 페트병 안에 꽁초만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역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으리라 감히 고백해보지만 뭐 어찌 됐든 그땐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유독 담배에 예민했던 대학시절을 보냈고 그때 만났던 몇몇 남자 친구들은 정말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맹세코 내가 그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마라 강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냥 그들이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이들이었다고 당시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원래는 담배를 피웠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철저히 담배 냄새를 없애고 흡연의 흔적을 남김없이 깨끗이 지우고서야 나를 만났었다는 숨겨졌었던 연애의 뒷배경에 난 꽤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데 '아 나 꽤 배려받았던 연애를 했었구나'로 귀결되는 감동이 아닌 '아니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었나' 하는 작은 배신감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말은 하지 않았어도 느낌적으로 담배를 싫어한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로 인해 나에게 미움을 받기 싫어 남몰래 자신의 기호 생활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러한 경험이 있으니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도 들고. 그렇지만 어느 순간 서로의 관계에 틈이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려 할 때 이러한 '남몰래 지켜온 나만의 배려'가 그 틈을 더 크게 만들고 갈등을 더 크게 폭발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까.
연애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도 이들과 비슷했다. 상대의 눈치를 보고 상대가 싫어할만한 행동은 사전에 차단하면서 그저 예쁨만, 사랑만 받고 싶었고 항상 서로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면서 갈등 없는 그런 완벽한 관계를 꿈꿨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난 꽤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 긴 시간들 동안 나는 상대의 기호나 상대가 원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어리석은 나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와 추구하는 바가 있다. 물론 그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커피에 우유를 타는 것이 좋은지 싫은지', '아침밥은 쌀이 좋은지 빵이 좋은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기호는 가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기호가 어떨 땐 상대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고 혹은 상대가 아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럴 때 대화를 통해 상대의 기호를 인식하고 이것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상대와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본질을 회피하거나 마주하지 않으면 나중에 걷잡을 수 없는 문제점들이 눈덩이처럼 커져 당신에게 달려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명절이 되니 한국에 있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우리 집 남자들'이 생각이 났는데 아버지라 불리우는 남자1과 남동생이라 불리는 남자2. 양초에 불을 붙일 성냥이 다 떨어져 급하게 편의점에 산 라이터를 들여다 보다 새삼 그들이 얼마나 건강한 기호 생활을 해왔었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