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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Jan 30. 2022

학교를 빛낸 사람들

결코 나의 이야기는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창 시절 남들보다 특출 났던 크나큰 목청 덕분에 친구들과 함께 떠들어도 선생님께 항상 내 이름이 먼저 불렸던 것을 제외하면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이 거의 없는 학생이었다. 중학교 땐 운이 좋게도 요즘으로 치면 인싸 친구들의 무리에 끼여 같이 만화책 이야기를 하거나 19금 영화 얘기를 하면서 낄낄댔었는데 굉장히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많이 봤던 당시 내 성격으로 봐서 그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나름 사회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내성을 아주 조금이나마 키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보다 잘난 친구를 보면 남몰래 질투를 하거나 나만 빼놓고 몇몇들 끼리 무리를 지어 놀거나 할 때는 상처도 받고 세상에 나만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주 너무나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되어버려서인지 이렇게 웃으면서 나름 공개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 강산이 변해도 정말 너무 크게 변했다.




 그런 나였기에 학교 현수막에 이름이 걸리거나 학교에 다시 돌아가서 선생님을 만난다거나 하는 그런 행위들은 조금은 나와 멀게 느껴지고 또 기시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에 '학교를 빛낸다는 행위' 자체를 생각도 하지 않고 지냈던 내가 이 주제를 꺼내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최근 내 신변에 일어났던 아주 조금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한국의 집과는 잘 연락을 하지 않기에 그저 가족의 생일,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 10분이 채 되지 않는 짤막한 통화가 전부였던 이제까지와의 패턴과 달리 그날은 조금 더 길어진 통화가 그 에피소드의 발단이었다.






「다음에 한국에 들어오면 한번 만나보지

공부를 미국에서 했고 지금은

서울에서 A인가 하는 대기업에서 일을 한대

너한테 말하면 아마 알 거라고

검색해보면 나오는 그런 유명한 회사라고

어디 어디 대학을 나왔는데 거기에

학교를 빛낸 사람들에 이름도 걸렸다더라

사기 같은 거 아니니까 한번 검색해봐 봐

너처럼 해외 생활도 오래 했고

라이프 스타일도 비슷할 것 같은데

엄마 생각엔 진짜 잘 맞을 것 같아

근데 진짜 딱 하나 흠이 있는데

아니 뭐 흠도 아니지 요새는」






엄마는 평소와 달리 말이 길었다. 그리고 평소 말끝을 잘 흐리지 않는 그녀가 이날은 유독 말 끝을 흐렸다. '흠'이 있는 남자를 딸에게 소개를 시켜주려 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것인지 아님 자포자기한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렇게 길고 긴 통화가 끝이 나고 연달아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주 화가 나 있었다.





「엄마가 미친 것 같아

어떻게 누나한테 돌싱을 소개한다는 거야

아무리 누나 결혼에 환장을 했어도 이건 아니지」






 동생은 마치 본인의 일이라도 된 양 굉장히 억양 된 목소리로 내게 엄마가 미쳤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평소 짜증은 잘 내도 화를 잘 내지 않는 동생이기에 난 조금 당황을 했는데 사실 오히려 그렇게 화를 내는 동생이 이해가 가면서도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서로 죽고 못 사는 애정 깊은 남매는 아니지만 나는 동생의 사랑을 이런 사건들로 인해 느낄 수 있었고 굉장히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나에게 돌싱을 소개해 주려 했다는 것에 크게 동요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오히려 만약 여기서 내가 '돌싱'에 발끈을 하고 그런 엄마에게 화가 났다면 굉장히 모순적인 사람이지 않을까. 난 유럽의 개인적 합리주의를 내 가치관의 기본 모토로 삼고 있고 상대가 돌싱이든 싱글이든 애가 있든 없든 (이제는) 크게 상관이 없다. 성적 취향은 바꾸기가 힘들어서 여전히 이성에게 끌리고 동성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아주 먼 미래에 혹시라도 나의 그런 취향이 바뀔 수도 있다고 그런 생각도 서슴없이 든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상대에게 끌릴 수 있다면 왜 만나지 않겠는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런 사람이 없어서 문제지 사실 성별은 큰 문제도 아니다. 무엇보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고 결혼을 하더라도 따로 살거나 각방을 쓰고 싶은 내게 동거는 당연히 필수이기도 하고, 이런 일련의 엄마가 들으면 돌아가실 법한 온갖 '괘씸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나인데 돌싱이 뭐 어떻단 말인가.




 나의 의식을 아주 조금 어지럽혔던 부분은 바로 다름 아닌 '학교를 빛낸 사람들'에 있었다. 학교를 빛낼 정도로 잘난 스펙을 가진 남자라는데 그 남자에게 나는 뭐라고 어필이 되었을까. 일본에서 공부했고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했으며 지금은 대만의 외국계 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는 다재다능한 처자라고, 흠이 하나 있다면 나이가 많다는 것인데 여태까지 공부하고 일한다고 남자 만날 시간이 없었다는 그런 흔해빠진 스토리로 포장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서른이 넘은 여자는 '노처녀'이고 애물단지가 맞았다. 출산이라는 신성한 행위를 최대한 어릴 때, 젊고 건강한 몸을 가졌을 때 해치워야만 하기에 한국의 여자들은 '선 시장'에서 항상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이 마음 아팠다. 엄마는 지금 내 나이가 마지노선이라며 올해를 넘기면 (작년 연말의 일이었다) 더 이상 아이를 낳기가 어려워질 거라고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직도 나는 그녀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프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달라야 하는 것이며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는지 결코 알 수 없는 답을 찾아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내가 바란 것은 그저 한마디 말이었다. 나를 믿는다는 그 말.





엄마는 너를 믿어

엄마는 네가 어떤 인생을 살아도 너를 지지할 거야

그러니 네가 원하는 길로 묵묵히 걸어 가

네가 행복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지 않아도 다 괜찮아





 나는 이 날을 기점으로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포기하기로 했다. 다름을 다름으로, 그냥 그대로 그렇게 놓아두기로 인생 최대의 결심을 했다. 나는 그녀를 바꿀 수 없고 그녀도 나를 바꿀 수 없다. 나는 그녀의 딸이지만 우리의 거리를 좁힐 일말의 가능성은 이제 없다. 그러니 내 생각을 그녀에게 푸시하지 않을 것이며 그녀의 그 어떤 잔소리에도 말대답하지 않기로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만약 지금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에게 '너를 믿어' '너의 어떤 결정도 존중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인생 최고의 버팀목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인생을 살면서 어떤 풍파가 닥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신을 믿어주는 그 한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당신의 어머니이므로. 하지만 나처럼 이런 어머니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당신을 믿어주는 그 한 사람이 바로 당신 자신이 되면 되니까.





 난 학교를 빛내지도 현수막에 이름이 걸리지도 못했지만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만족스럽고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타이완'에서 보내고 있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지 못했고 일류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으며 남들과 똑같이 결혼을 하지도 아이를 낳지도 않았지만 행복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혹시라도 지금 굉장히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를 보고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므로 내 행복도 내가 결정하면 된다.

加油!(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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