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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Aug 14. 2021

아기 오리 작은발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깊고 한적한 어느 산골. 푸른 나무들이 우거진 숲을 지나 커다란 강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작은 송사리들은 물속을 올망졸망 헤엄치고, 청개구리 가족은 초록 잎새 위에서 개굴개굴 노래하고, 동글동글 비버들은 강둑을 따라 든든한 댐을 짓고, 알록달록 물총새는 물속으로 멋지게 다이빙을 하고, 행복한 카피바라들은 물가에 앉아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있다.


뒤뚱뒤뚱 오리 한 무리가 수풀 사이를 헤치고 나와 강물에 몸을 담근다. 꾸왁꾸왁 푸드드득. 기분 좋게 물을 끼얹은 오리들은 물갈퀴를 쫙 펴고 둥실둥실 물 위를 떠다니며 맛난 수초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런 무리의 한 켠, 물에 들어가지 못한 아기 오리 한 마리가 뒤처져 있었다.


“바보야, 넌 이 쉬운 것도 못하니?”

“쟤는 발이 너무 이상해서 수영도 못 하고 맛있는 먹이도 못 먹는대.”

“그냥 물에 둥둥 떠 있으면 되는데, 바보라서 그런 것도 못 한대.”


동갑내기 오리들은 벌써 저만큼 앞서서 물 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친구들의 놀림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기 오리는 너무 작고 초라한 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 흔한 물갈퀴도 없이 나뭇가지처럼 얇고 앙상한 발이었다. 그런 발로 물 위를 헤엄치는 건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결국 배고픔에 지쳐 땅 위에 거친 풀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가여운 아기 오리의 이름은 ‘작은발’이었다.

   

“형아는 왜 그런 걸 먹고 있어? 이리 들어오면 맛있는 거 많이 있어 이리로 와.”


아주 어린 오리들이 얕은 물가를 헤엄치며 말을 걸어왔다. 작은발은 씁쓸히 웃는 것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이리 와봐 형아 여긴 너무 재미있어 꼬왁꼬왁.”


참방참방 물장구를 치던 어린 오리들은 잔뜩 신이 났는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뛰어놀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 엄마가 저런 친구랑 놀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노래는 부르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이야기하니. 오리는 목소리가 거칠어서 시끄럽고 듣기 안 좋단 말이야. 오리는 노래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야! 어서 이쪽으로 와서 조용히 놀아.”

    

노래소리를 들은 어미 오리들이 다급히 아이들을 데려가기 시작했다. 작은발을 향한 그들의 눈빛은 차갑고도 날카로웠다. 모두가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도대체 난 왜 수영을 못 하는 걸까? 힘없이 고개를 떨군 작은발의 모습이 일렁이는 강물 위에 떠 올랐다. 거기에는 작고 초라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운 오리 한 마리가 그렁그렁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괜찮다 우리 아가. 너도 곧 수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거야. 남들처럼 잘 할 수 있을 거야.”

 

어미 오리들이 멀리 사라지자 안절부절 지켜보던 엄마 오리가 다가와 등을 토닥여줬다. 엄마의 위로에도 작은발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얼른 수영을 배우지 못하면 엄마도 저 멀리 가 버릴 것 같았다.

     

“오리는 수영을 잘해야 하는 법이란다. 열심히 연습해서 올해 수영시합에 1등만 하면 모두에게 인정받는 훌륭한 오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다 괜찮아질 거야.”

     

오리 무리에서는 일 년에 한 번, 갓 성년이 된 아이들이 수영 능력을 겨루는 시합이 열린다. 강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섬을 출발해 강 상류까지 쉬지 않고 빠르게 헤엄치는 시합이었다. 적지 않는 거리를 헤엄치는 만큼 완주도 쉽지 않은 경기였다. 하지만 여기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엘리트 출신 오리들에겐 대장 오리가 되거나, 좋은 둥지를 고를 수 있는 등 많은 특권이 주어진다. 그래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얼른 수영을 배워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더이상 혼자 있지 않아도 될 거야, 엄마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을 거야! 나도 어서 다른 오리들처럼 멋있게 물 위를 헤엄치는 오리가 되어야 해!’

     

단단히 다짐하는 작은발의 마음 한쪽이 가시가 박힌 것처럼 저릿저릿 간지러웠다.     




다음날도 작은발은 열심히 물속을 첨벙거리고 있었다. 엄마가 데리고 온 연습 장소는 으슥하고 눈에 띄지 않는 모퉁이 물가였다. 여기는 평소보다 조금 멀리까지 나와야 했지만,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연습하기엔 꼭 알맞은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수영 실력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앙상한 발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냥 어딘가로 꼭꼭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때, 어디선가 산새들이 예쁘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가의 맞은편,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푸르른 숲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청아하고 예쁜 노랫소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듣고 싶었다. 작은발은 문득 숲이라는 곳이 궁금해졌다.

     

“엄마, 저 숲속에는 뭐가 있어요? 너무 예쁜 소리가 나요.”

“안돼! 저기는 무시무시한 산짐승이 우글거리는 무서운 곳이란다. 오리는 숲에 가면 금방 잡아먹히고 말아요! 지금까지 어떤 오리들도 숲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단다. 너도 똑같이 그래야만 해.”

“그래도 아무도 가본 적이 없잖아요. 혹시 한 번 가 보면..”

“안돼! 예전부터 그래왔고 아무도 하지 않는 일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러니까 다시는 숲 얘기는 꺼내지도 말고 열심히 수영 연습이나 하렴.”

    

이렇게 단호한 엄마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더 고집을 부리면 크게 혼날 것 같았다. 크게 미움받을 것 같았다. 자꾸만 숲으로 시선이 갔지만 호기심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여러 날이 지나고 시합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작은발의 몸집은 제법 커졌지만, 작고 앙상한 발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서 나와요. 이러다 늦겠네. 아니 뭘 하느라 이렇게 꾸물거린담?”

“네. 지금 갈게요.”     


이웃 둥지의 나이 많은 오리 아줌마가 밖에서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시합이 다가오면 어른 오리들도 바빠진다. 다 같이 모여서 수영 코스도 정비하고 방해물을 정리하느라 하루 종일 둥지를 비우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부터 작은발은 혼자서 연습을 해야 한다. 엄마 없이 하는 수영은 처음이라 걱정도 되고 한편으론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아들내미는 이제 물에는 좀 떠요? 오리가 수영을 할 줄 알아야지 하나 있는 아들이 저 모양이라 어쩐대 그래.”

“네 뭐 그렇죠.”

“아니, 알 하나도 제대로 못 낳던 자네한테 아이가 생겼을 땐 이제 좀 구실을 하는구나 싶었는데, 아이까지 저렇게 모자라게 태어날 줄 누가 알았나 그래.”

“금방 잘할 거예요.”

“어휴 저래서야 어디 먹이라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몰라. 내가 다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야 이게.”

“어서 가시죠. 늦겠어요.”

     

또 저런 말을 듣기 싫어서 둥지 안에 가만히 숨어있었는데. 차가운 말들이 여지없이 작은발의 마음을 찌르고 들어왔다. 아프게 말하는 아줌마도 미웠고 아무 말도 못 하는 엄마도 미웠다. 무엇보다 모자라고 덜떨어진 자기 자신이 너무 미웠다. 시합이고 연습이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오늘은 그냥 가만히 누워있고 싶었다.

그때, 멀리 숲속에서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노래는 아프고 조각난 마음의 틈새로 가득 새어 들어왔다. 참 따뜻한 소리였다. 텅 빈 가슴이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힘들었던 마음이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때마침 오늘은 엄마의 참견 없는 날이었다. 그러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숲을 보고 올 수 있지 않을까? 엄마는 사나운 짐승들이 위험하다고 했지만, 숲을 한 번 볼 수 있다면 그렇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작은발은 숲의 초입에 서 있었다. 높은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반짝이고 알록달록 예쁜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간지럽히자 기분 좋은 흙냄새와 상쾌한 나무의 향기가 느껴졌다.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릴 만큼 멋진 풍경이었다. 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는 누구니? 처음 보는 녀석이구나.”

“으앗!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나무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굵직한 나뭇가지 위로 커다란 눈 두 개가 꿈벅꿈벅 반짝이고 있었다.

 

“녀석, 별게 다 죄송할 일이구나. 숲에는 처음 와본 거니?”

“네, 저는 강가에서 온 오리예요. 이름은 작은발이예요.”

“흐으음 그렇구나. 반갑구나 아가야, 난 모르는 게 없는 지혜로운 부엉이 할미란다.”     


이상한 할머니다. 자기 입으로 저런 말을 하다니.     


“근데 할머니는 정말로 모르는 게 하나도 없어요?”

“홀홀홀 그럼 그럼 니가 나만큼 오래 살아보거라. 왜, 뭐 궁금한 거라도 있는 거니?”

“네! 저는 수영을 잘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주세요!”

“흐으음 수영이라. 너는 왜 수영을 잘하고 싶니?”

“어? 음. 음. 으음. 당연히 그래야죠. 오리는 수영을 잘해야 해요. 근데 전 그게 잘 안돼서 너무 싫어요.”

“그랬구나. 열심히 노력하고 애써도 잘 안됐나 보구나. 잘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된 모양이구나.”


부엉이 할머니는 작은발을 지긋이 바라보며 대답해주었다. 그의 발은 상처투성이에 새파랗게 멍이 들어있었다.


“아가, 해야 하는 게 너무 어렵고 아프다면 할 수 있는 걸 먼저 해보는 건 어떠니? 그러다 보면 언젠가 네가 하고 싶은 것에 가까워질 수도 있단다.”

“그치만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는걸요.”

“글쎄다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할미가 정해줄 수는 없다만, 너는 멋진 날개를 가지고 있구나. 나도 훌륭한 날개를 가지고 우아하게 날아다니곤 한단다. 한 번 이쪽으로 날아와 보겠니?”

“오리가 날 수 있다고요? 하늘을 나는 오리는 본 적이 없는데요? 오리는 수영만 잘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 엄마도, 대장 오리 아저씨도 한 번도 날아다닌 적이 없어요.”

“글쎄, 그건 그냥 지금까지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다는 뜻 아니니? 네가 직접 도전해보고 실패를 경험한 게 아니라면 그게 불가능하다고는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는 거란다. 다른 누군가의 의견에 휩쓸리지 말고 너만의 경험을 소중히 쌓아가렴.”

“정말로 제가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네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이 할미의 생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단다. 그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는 게지.”


부엉이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으며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고, 어서 이걸 하라고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작은발은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질끈 눈을 감고 내디딘 힘찬 날개짓에 조금씩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어느새 할머니가 있는 나무 위까지 날아올랐다. 얇고 앙상했던 발은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앉기에 꼭 알맞았다.

     

“와! 이거 보세요! 제가 날았어요!”

     

신이 난 작은발은 할머니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다시금 날아올랐다. 나무 위를 넘어 높이높이 날아다녔다. 두둥실 하늘을 날아보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둥실둥실 물 위에 떠 있는 게 이런 기분일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자유로움이었다. 한껏 신이 난 작은발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마음껏 날아다녔다. 높은 곳에서 둘러보니 멀지 않은 숲속에 작은 호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엔 또 어떤 새로운 것들이 있을까? 작은발은 설레는 마음으로 호숫가에 내려앉았다.

     

“거 녀석도 참, 못한달 땐 언제고 아주 신이 나서 날아가는구나. 이 할미가 놓칠 뻔했어요.”

“앗 깜짝이야. 언제 오셨어요 할머니?”

“하늘도 처음 날아보는 천방지축을 혼자 보낼 수야 있겠니? 그나저나 너는 참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구나. 네 노래를 들으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고 신이 나지 뭐니.”     


큰일이다. 내가 노래를 했었구나. 무심코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노래를 해버렸나 봐요.”

“음? 게 왜 죄송할 일이니? 더군다나 그렇게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아니에요. 원래 오리는 목소리가 거칠어서 다들 시끄럽고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때 몇 마리 백조들이 호수 위를 달리면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날개로는 몸을 띄우면서 발로는 물을 박차며 나아가는 그 모습에 작은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할머니! 저거에요! 저는 수영은 못해도 날 수 있으니까 저렇게 물 위를 날면서 수영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되는 거겠죠?”

홀홀홀. 아가야, 무얼 하든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렴. 그게 진짜 네가 해야 할 일이란다.”

    

할머니는 여전히 웃으며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답을 내어주진 않았지만,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주저 없이 날개를 편 작은발은 호수 위를 낮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첨벙. 풍덩. 너무 낮은 높이에 물로 곤두박질치거나, 발이 물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드디어 물 위에 떠 있구나! 수영을 할 수 있구나! 심장이 터질 듯한 기쁨에 하루 종일 호수 위를 날아다녔다. 다행히 작은발은 날개짓에 소질이 있었다. 금방 적당한 높이로 날면서 물을 박차고 헤엄칠 수 있게 됐다.

    

“할머니! 됐어요! 이제 시합에서 1등도 할 수 있어요! 이제 아무도 저를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이제 다들 저를 사랑해줄 거예요!”

     

작은발은 모두를 놀라게 해주고 싶어졌다. 시합 날까지 엄마에게도 비밀로 하고, 연습도 매일매일 숲속 호수에서 몰래 하기로 했다.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시합 전날이 되었다. 작은발은 마지막 연습을 위해 숲속 호수로 총총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가, 지금 어디 가는 거니?”     


엄마의 목소리였다. 숲의 입구에서 아들을 불러세운 엄마의 눈은 더없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아니 엄마. 그게.”

“요 며칠 강가에 안 보인다 했더니 저런 데를 드나들고 있었던 거니? 대체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하는 거니? 수영도 못 하는 오리가 숲속을 쏘다닌다고? 다른 오리들이 널 뭐라고 생각하겠니?”

“내 말 좀 들어 봐요. 엄마가 몰라서 그래요. 저기 숲에는..”

“아니, 넌 아무것도 몰라. 이런건 엄마가 제일 잘 알아!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기본적인 것도 하지 못하면 내내 무시당하고 차별당한다고!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아니 그게 아니라.”

“시끄러! 잔말 말고 이리 와서 수영 연습이나 해. 다른 오리들은 벌써 시합 코스까지 미리 돌아보고 있다던데 넌 대체 어떻게 되려고 이러니.”


며칠간 날아오른 높이만큼 붕 떠 있던 마음이 호수 바닥까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심장의 한쪽 구석에서 무언가 뜨겁게 울컥거렸다.

   

“엄마, 엄마한테 나는 뭐예요? 나 때문에 힘들기만 해요? 내가 없어져야 행복한 거예요? 나는 엄마가 그냥 좋아요. 근데 엄마는 어때요? 나는 뭔가를 해내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는 거예요?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사랑받을 순 없는 거예요? 다른 오리들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나를 봐줄 수는 없는 거예요?”

   

울컥 터져 나온 아들의 감정에 엄마는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가웠던 눈빛은 초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웃 어른들이 못된 말을 쏟아낼 때처럼 그냥 그렇게 있었다. 가만히 굳은 채 작은발이 있는 숲 쪽으론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다.  

어둡던 하늘이 기어이 장대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작은발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숲을 향해 나아갔다. 아무도 잡는 이가 없었다. 호수로 가는 길엔 작고 앙상한 발자국만 쓸쓸하게 남아있었다.

   

작은발은 호수 옆 나무 밑에 앉아 찬찬히 마음을 식히기로 했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다들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들이 왜 나에겐 없는 걸까. 너무 불공평했다. 다시 둥지로 돌아가야 할까? 내일 시합은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답답하기만 했다.


문득 힘들 때 위로가 되었던 산새들의 노래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온통 빗소리뿐 따뜻한 소리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울적해진 작은발은 혼자서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누가 있더라도 주룩주룩 빗소리는 못난 목소리를 가려주기 꼭 알맞았다. 민폐가 될 일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보다 열심히,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불렀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로하는 노래를 불렀다. 해가 지고 밤이 되도록 부르고 또 불렀다.

  

“아이고 곱다. 다른 노래는 없니? 또 듣고 싶구나.”

“앗 깜짝이야. 할머니? 언제 오셨어요? 여기서 뭐 하세요?”

“뭐하긴 좋은 소리가 들리길래 가까이서 들으려고 날아왔지.”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셨어요?”

“부엉이는 원래 야행성이란다.”

“저랑 만날 때는 낮에도 활동하셨잖아요.”

“원래 늙으면 잠이 없어지는 법이거든. 홀홀홀”

     

할머니 때문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오랜만에 나누는 실없는 대화가 쓸쓸한 기분을 달래 주었다. 그런데 잠깐, 내 목소리가 들렸다고? 어느새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 밝은 달이 호수를 비추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동물들이 작은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앗! 죄송해요. 제 목소리가 들릴 줄 몰랐어요. 듣기 싫으셨죠. 죄송해요.”

“아가, 자세히 보렴. 다들 네 노래를 들으려고 이렇게 모여있는 거란다.”

    

“맞아요. 저는 저기 강가에서부터 예쁜 소리를 듣고 찾아왔어요.”

동그란 꼬리를 방석 삼아 앉아있던 비버들이 말했다.

    

“오늘은 종일 비가 와서 힘들었는데 덕분에 기운이 났어요. 또 노래해 주세요!”

빗방울이 가득 맺힌 집을 청소하던 거미가 말했다.

    

“저도 또 듣고 싶어요! 하나만 더 불러주세요!”

작은 수달들도 호수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해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들이었다. 나는 노래를 해도 괜찮은 건가? 이제 참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떨군 작은발의 모습이 잔잔한 호수 위에 떠 올랐다. 거기에는 오리들과는 전혀 다른, 처음 보는 새 한 마리가 그렁그렁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작은발아, 이제 진짜 네 모습이 보이니? 너는 목소리가 참 예쁜 꾀꼬리로구나.”


할머니의 한 마디에 비로소 실감이 났다. 내가 부족하고 뒤떨어졌던 게 아니었다. 내가 무얼 가졌는지 몰랐던 것뿐이었다. 더 이상 물갈퀴도 없는 앙상한 발이 부끄럽지 않았다. 작은발의 눈동자가 늠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하고 싶니?”

“강가로 돌아가야겠어요. 가서 내일 시합도 이기고 당당하게 나를 보여줄 거예요.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올게요!”

    

강가로 날아가는 작은발의 뒷모습엔 조금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합 날 아침이 밝았다. 모든 무리가 바위섬 주변에 둥실둥실 떠 있었고, 시합을 치르는 오리들은 출발지점에 모여있었다. 어제 내린 비로 강물의 수위가 조금 높아졌지만, 수영을 잘하는 오리들에게 문제 될 건 전혀 없었다.


“어디 보자, 우리 선수들은 다들 모였나? 한 명이 모자라는데? 작은발, 작은발은 어디에 있니?”

“저 여기 있어요.”

 

바위틈에서 나타난 작은발은 곧장 출발선 앞으로 향했다. 비웃음이 가득한 수십 개의 시선들, 그리고 걱정이 가득한 하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직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시합을 마치고 모든 것을 보여준 다음 엄마를 만나고 싶었다.


“자, 그럼 모두 준비이. 출발!”     


신호에 맞춰 오리들이 일제히 물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누구보다 빠르게 발을 움직이는 오리도 있고, 물 밑으로 잠수해서 저만큼 앞으로 나아가는 오리도 있었다. 저마다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속력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선두에 있는 건 미끄러지듯 물 위를 달려가는 작은발이었다. 지켜보는 어른들도, 함께 경쟁하는 친구들도 깜짝 놀라 서로의 눈을 의심했다. 작은발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물 위를 날아가는 수영 방식은 생각보다 더 빠르고 압도적이었다. 아무도 작은발을 따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방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날개를 파닥이고 수면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우지끈! 쿠과아앙!!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커다란 파도가 작은발과 오리들을 덮쳤다. 높아진 수위를 견디지 못한 비버의 댐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양의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온 것이었다. 열심히 경쟁하던 오리들은 물론 바위섬에 있던 무리들도 폭포 아래 나뭇잎처럼 급류에 휩쓸리고 있었다. 오리들의 둥지가 있던 수풀도 모두 물에 잠겨 휩쓸려 가버렸다. 강 위에 남아있는 건 높이 솟은 바위섬뿐이었다.

간신히 자세를 잡은 작은발은 다급하게 날아다니며 물에 빠진 친구들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아래쪽 오리무리도 경험 많은 어른들을 중심으로 서로를 도와 바위섬으로 피신하고 있었다. 다행히 모든 오리들이 높은 바위섬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강물은 점점 더 불어났고, 물살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철썩철썩 드센 파도가 오리들의 발밑을 때리고 있었다. 유일한 피난처인 바위섬은 점점 물에 잠기고 있었고, 오리들은 더이상 이동할 곳이 없었다. 커다랗게 휘몰아치는 강물은 수영을 잘하는 오리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게 뭐야, 우리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거야?”

“으아앙 무서워. 나갈래 엄마아.”

   

자유롭게 뛰놀던 물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 오리들은 큰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고 어른들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안절부절 불안하게 불어나는 물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위험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여러분!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 모두 살 수 있어요!”


작은발이 소리쳤지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엄청난 두려움과 무력감이 오리들의 귀를 막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내 말을 전할 수 있을까? 순간 두렵고 힘들었을 때 위로가 되었던 것이 생각났다. 작은발은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소란스럽던 오리들이 하나 둘 조용해졌다. 예쁜 목소리와 부드러운 선율이 두려움을 몰아내고 있었다.


“여러분 저에게 방법이 있어요. 수영으로 탈출할 수 없다면 하늘로 날아가면 돼요. 우리 모두 날아오를 수 있어요.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하늘을 나는 오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걸.”

“할 수 있어요! 우리 모두 이렇게 날개를 가지고 있잖아요! 다른 누군가의 의견에 휩쓸리지 말고 여러분이 가진 것을 똑바로 바라봐요!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을 뿐이지 여러분이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잖아요! 그럼 어느 누구도 그게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거예요!”


불안함에 우물쭈물 망설이는 오리들 사이로 한 마리의 오리가 걸어 나왔다.     


“나는 해보겠어요. 어떻게 하면 되는 거니?”

“엄마.. 응! 날개를 쭉 펴고 공기를 붙잡듯이 이렇게 날개짓 하면 돼요!”


작은발이 먼저 힘차게 날아오르고, 곧이어 엄마도 바위섬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망설이던 다른 오리들도 하나 둘 뒤를 이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오리가 날아오를 무렵 바위섬은 파도에 삼켜져 완전히 물에 잠기고 말았다.


“여러분 저를 따라오세요. 좋은 곳을 알고 있어요.”


작은발은 터전을 잃은 무리를 데리고 숲속 호수로 향했다. 단 한 마리의 오리도 망설이지 않고 작은발을 따라 숲속에 내려앉았다. 호수를 마주한 오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이렇게 예쁜 풍경은 처음이었다. 평화로운 호숫가는 그 어느 곳보다 살기 좋은 곳이었다.


기뻐하는 오리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작은발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작은발아. 우리 아들.”

“아 엄마. 저기 어제는..”

“어제는 엄마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었지. 미안하구나. 지금까지. 모든 것들을 엄마가 잘못하고 있었구나. 네가 내 아들인 게 너무나 고맙고, 또 자랑스럽단다.”     


엄마는 누구보다 따뜻하게 작은발을 꼭 안아주었다. 굳이 말로 전하지 못해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따뜻한 눈물이 주루룩 엄마와 아들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 보니 오리무리가 그들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여있었다. 작은발이 어리둥절 그들을 둘러보자 대장 오리가 깊이 고개를 숙이며 존경의 예를 표했다. 그를 시작으로 모든 오리들이 작은발에게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엄마도 한 발짝 물러나 아들을 향해 자랑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행동에는 그동안의 뉘우침이 담겨있었고, 오늘의 감사함이 담겨있었다. 작은발도 그들을 향해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따뜻한 햇볕을 받은 호수가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깊고 한적한 어느 숲속. 푸르른 나무들 사이로 작은 호수가 반짝이고 있다.


귀여운 다람쥐는 나뭇가지 사이를 포로로로 달려가고, 하얀 나비들은 꽃들 사이에서 살랑살랑 춤을 추고, 빨간 머리 딱따구리는 나무를 쪼아 튼튼한 집을 만들고, 깡충깡충 토끼들은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둥실둥실 오리들은 여유롭게 호수 위를 헤엄친다.


그리고 행복한 꾀꼬리 한 마리가 누구보다 즐거운 목소리로 예쁜 노래를 마음껏 지저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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