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도쿄 라이프

아카사카 4

by 하임

회사에서 8분 거리에 히에 신사(日枝神社)가 있습니다. 큰 도로변에 우뚝 솟은 2층 높이의 붉은 도리이(鳥居)와 그 너머로 보이는 가파른 계단. 첫인상은 상당한 거리감을 주지만, 사실 계단 양옆으로 상행과 하행 에스컬레이터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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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사들은 저마다 영험함을 발휘하는 ‘전문 분야’가 있습니다. 이나리 계열의 신사는 재물과 사업 번창에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신의 사자인 여우(키츠네) 상이 경내에 있으며 종종 재물 창고의 열쇠를 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학업과 합격 기원으로 유명한 텐만궁 계열의 신사는 헤이안 시대의 뛰어난 학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학문의 신’으로 모십니다. 그가 소와 인연이 깊어 소를 신의 사자로 여기는데, 신사 내에는 ‘나데우시(撫で牛, 쓰다듬는 소)’라는 소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의 머리를 만지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히에 신사의 신의 사자는 원숭이입니다. 일본어로 원숭이는 ‘사루(さる)’인데, 히에 신사에서는 특히 원숭이를 '마사루(まさる, 神猿)'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은 '승리하다(勝る)'와 발음이 같아 시험이나 경쟁에서의 승리, 출세, 사업 번창에 효험이 있다고 하고, '마(魔)가 사라지다(去る)'와 발음이 비슷하여 액운을 물리치는 효험이 있다고도 합니다. 도쿄 도심의 빌딩 숲 사이에 자리한 이곳은 도쿄 10사(東京十社) 중 하나로 꼽히는 유서 깊은 신사로, 아카사카와 나가타초 비즈니스 지구 사이에 위치하며 '산노상(山王さん)'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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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 신사는 평소 점심 식사 후 잠시 들르던 산책 코스였습니다. 식후 오른 혈당을 잠재우기엔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파워 스팟’의 기운으로 내면이 정화되기를 바라며 가볍게 걷곤 했습니다.

올해 제 운세는 복음(伏吟), 즉 ‘엎드려 신음하는’ 운이라고 합니다.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연초만 해도 몰랐는데, 7월 말 한여름부터 여기저기 문제가 터지더니 8월에는 묵언 수행이라도 해야 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 인생에서 불운을 꼽자면 두 번째 쯤 되는 기간이었죠.

사주를 보니 내게는 금(金)의 기운이 과한데, 이를 씻어줄 물(水)의 기운이 부족한 탓이랍니다. 그래서 올해는 동료나 경쟁자와의 갈등, 배신, 시기, 재물 다툼 같은 인간관계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요. 지나고 나면 참 잘 맞는다는 생각에 운세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엉망인 운세라도 늘 귀가 솔깃해지는 해결책을 함께 제시해 줍니다. 양력 11월부터는 강력한 물(水)의 기운이 들어와 막혔던 일의 실마리가 보일 거라는 희망과 함께, “운명은 때론 아픈 방식으로 불필요한 인연을 걷어낸다”는 위로의 말도 덧붙여주었습니다.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고 마음이 답답할 때면, 서울에 있을 때 찾던 북한산 문수사가 떠오릅니다. 문수봉 아래 자리한 그곳은 천연 동굴 법당이 있고, 동쪽의 보현봉과 서쪽의 비봉을 마주하여 멀리 관악산과 한강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절경을 자랑합니다.

무거운 머리를 이고 한 시간 반 남짓 오르는 길,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마다 마음의 짐도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듯했습니다. 마지막 계단을 헉헉대며 오르고 나면, 복잡했던 머릿속은 어느새 비워지고 응진전 앞에 기대앉아 멍하니 먼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습니다.

문수사 응진전 말고도 관악산 연주사 툇마루는 근심을 씻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는 양양의 홍련암을 찾곤 했습니다. 이런 장소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좋은 터가 주는 힘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고 새로운 기운이 솟아났으니까요.

그러던 8월의 어느 날, 문수사 오르던 그 길이 간절해졌을 때, 퇴근길에 히에 신사를 찾았습니다. 신사 입구 초즈야(手水舎)에서 국자를 들어 천천히 왼손과 오른손을 씻고, 손에 물을 받아 입을 헹궜습니다. 그리고 본당 앞에 서서 마음에 억눌려 있던 근심을 토해내고, 담아두었던 소원 하나를 강렬한 촛불처럼 태워 보냈습니다.

그때 히에 신사는 내겐 문수사였고, 홍련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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