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도쿄 라이프

아카사카 5

by 하임

점심시간의 아카사카(赤坂) 거리. 유명 해리포터 테마 숍 주변은 두 개의 모습이 교차합니다. 하나는 캐리어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하는 관광객들이고, 다른 하나는 런치 세트 4,500엔의 비즈니스 중식당 <리큐(璃宮)>부터 가케 우동 한 그릇에 230엔 하는 <츠루마루(鶴丸)>까지, 각자의 주머니 사정에 맞는 가게를 찾아 노렌(暖簾) 앞에 줄을 서는 직장인들입니다. 그 외에도 도시락 가게 진열장 앞에서 신중하게 메뉴를 고르는 모습, 편의점 봉투를 손에 든 채 바삐 걸어가는 분들은 영락없는 이 동네 직장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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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회식 장소이자, 수많은 한식당과 사케집, 와인바, 그리고 지금은 많이 사라진 듯한 한국인 클럽까지. 밤이면 아카사카(赤坂)는 진한 화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합니다. 저도 2010년 무렵 업무 차 아카사카에 왔을 때, 1차로 북해도(北海道) 해산물 이자카야에서 저녁 겸 '아카키리시마(赤霧島)' 소주를 마시고, 2차는 각 지역의 굴 이름이 적힌 접시를 내어주던 와인바에, 3차는 애매한 나이의 마마상이 운영하는 스낵바(スナック)에 들렀던 기억이 납니다. 1994년쯤 출장 왔을 때, 아카사카에서 술집 아가씨를 '미즈와리'라고 불렀던 한국인 클럽에 들렀던 기억까지 더하면, 아카사카는 제게 '직장인 접대의 대명사' 같은 곳입니다.

그런 아카사카의 낮을 보면 신바시(新橋), 칸다(神田), 하루미(晴海) 등 여느 오피스街와 다름없이 차분한 현실이 보입니다. '오늘 무엇을 먹을까'하는 즐거운 설렘보다 '한 끼에 얼마까지 쓸 수 있을까'하는 현실적인 계산이 앞서는 곳. 바로 이곳 아카사카가 우리 직원들의 일터입니다.

우리 회사 직원의 50%는 20대입니다. 그 중 절반은 재일동포이거나 한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 온 한국계 젊은이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한류를 좋아하는 일본 친구들입니다. 도쿄(東京) 인근 사이타마(埼玉) 출신도 있고, 큐슈(九州)의 미야자키(宮崎), 시코쿠(四国)의 카가와(香川), 오사카(大阪), 북부의 이와테(岩手) 등 참 다양한 지역에서 도쿄로 올라온 젊은 친구들이 함께 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재택근무 폐지처럼 모두에게 적용되는 불이익은 감수하면서도, 수당 등 개인적인 손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목소리를 냅니다. 여느 나라의 2030 세대와 꼭 닮은 모습이죠.

다른 일본 회사들처럼 기본급은 대졸 초임이 23만 엔 정도 됩니다. 일본식으로 계산하면 1년에 2번의 상여금이 기본이니, 초임 연봉은 14개월 치 급여(23만*14)에 각종 수당을 더해 대략 300만 엔 남짓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회사에서 전액 지원되는 출퇴근 교통비인데, 이 마저도 회사에 따라서는 지급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이들의 지출 중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월세입니다. 아카사카(赤坂)가 있는 미나토구(港区)와 정부 기관이 밀집한 치요다구(千代田区)는 1LDK(약 10평) 월세가 18만~30만 엔에 달하고, 신주쿠(新宿) 역시 15만 엔에 육박합니다. 그러다 보니 대졸 초임을 받는 젊은 직장인들은 대부분 편도 1시간 이상의 거리인 이타바시구(板橋区) 같은 도쿄(東京) 23구 외곽지역이나 사이타마(埼玉), 치바(千葉) 같은 주변 도시에서 출퇴근을 해야 7~8만엔의 월세가 가능합니다. 심지어 우리에겐 영화 <바닷 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으로 익숙한, 그 고즈넉한 바닷가 마을 가마쿠라(鎌倉)의 부모님 댁에서 2시간이 넘는 거리를 통근하는 직원도 있습니다. 성인이 되면 독립하는 일본의 전통도 비싼 월세라는 현실 앞에서는 세월의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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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직원들에게 아카사카의 점심 가격은 '부담'입니다. 보통 런치세트가 1,200엔(세금 별도) 내외입니다. 여기에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더하면 하루 점심 예산은 최소 1,700엔이 됩니다. 한 달이면 4만 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죠. 모바일 통신료도 7,000엔 정도 내야 하고,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에 스포티파이 등 음악도 좀 들으려면 이것 또한 한 달에 1만 엔은 훌쩍 넘어갈 겁니다. 주말에 친구 만나서 간단하게 노미가이(飲み会 /술자리) 라도 하면 1만엔, 그리고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초대되면 축의금은 3만엔 또는 5만엔이 기본이고, 많이 친하면 7만엔을 각오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비용을 그들의 월급에서 쓰야 합니다.

직원들 중 몇몇은 도시락을 싸 오기도 합니다. 전날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미리 싸 둔다고 하더군요. 600~700엔 내외의 벤또 전문점 도시락이나 300엔짜리 오니기리, 혹은 컵라면 하나로 점심을 해결하는 직원들도 있습니다. 화려한 아카사카의 낮은, 젊은 그들에게 이토록 치열한 삶의 현장입니다.

이렇게 팍팍한 현실 속에서, 제가 젊은 직원들과 부담 없이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가 바로 '점심 초대'입니다. 일주일에 2~3번 정도 2~3명의 직원을 초대해 함께 점심을 먹는데, 의외로 순순히, 게다가 적극적으로 초대에 응합니다. 스미다강(隅田川) 뱃놀이나 도요스(豊洲) 강변의 바비큐 파티, 단체 영화 관람 후 회식 같은 행사는 '전형적인 회식'으로 일견 화려해 보이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젊은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제가 취임한 첫해였던 작년에는 회사 분위기를 좀 올려보려고 가을 체육대회나 송년회 개최 설문조사를 했는데, 두 건 연속 한 표 차이로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될 정도였죠. 올해는 시작하자마자 아예 '올해 단체 회식 없음'으로 결정했습니다.

점심은 대개 아카사카에 흔한 한식당이나 파스타 집을 이용합니다. <요푸 (ヨプの王豚塩)>라는 한식당은 주방에서 삼겹살을 구워 순두부나 김치찌개와 함께 내어주는 런치 정식으로 유명한데 가격은 2,000엔에 육박하고, <홍콩반점>의 탕수육 런치 세트도 1,350엔 정도입니다. 식사 후 커피에 디저트까지 곁들이면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납니다. 평소 점심시간 1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그들이지만, 점심 모임 90분은 일종의 '공식적인 업무 미팅'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점심 모임에서 저는 가급적 회사 일은 묻지 않고 사적인 친교의 시간을 갖고 싶은데, 오히려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냅니다. 작년 입사 4개월 차 직원이 점심 자리에서 갑자기 웃으며 "월급 올려주세요"라고 요구해 깜짝 놀랐는데, 결국 12월에 다른 회사로 이직했습니다. 그 외에도 "재택 근무를 늘려주세요", "연초나 골든 위크 때 회사 지정 휴일을 늘려주세요", "주택 수당을 주세요" 같은 현실적인 요구가 많습니다. 심지어 "종무식 하지 말아 주세요. 연말연시 여행 가는데 눈치 보여요. 시무식도 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듣다 보면 휴가, 재택 등 근무 조건과 '돈(월급, 수당)'이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우리 회사의 연간 이직률이 30%에 달하고, 일본 대졸 신입의 3년 내 이직률이 30%라는 통계를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요구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점심시간을 통해 직원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합니다. 한국 출신 직원들에게는 일본 생활 고충이나 주말 도쿄(東京) 탐방기, 부모님과의 소통 문제를 주로 듣고 있습니다. 일본 직원들에게는 '괴수 8호' 같은 인기 애니메이션 이야기, 고향 친구들은 다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지만 자기는 도쿄에서 꼭 결혼하겠다는 20대 후반 직원의 다짐, 그리고 최근 한국 여행에서 올리브 영이 필수 코스라는 이야기부터 '대전 성심당 빵집 방문'이 서울 여행 버킷 리스트였다는 한 직원의 한국 관심까지. 가능하면 그들의 일상에 대해 들으려고 합니다.

이런 솔직한 '삶의 조각'들을 마주하다 보면, 2025년 도쿄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밤이 화려한 아카사카가 일터인 그들의 사는 모습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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