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닝 1
통상 서울의 공기업이든 사기업이든, 도쿄 지사로 파견 근무를 오는 사람들은 30~40대가 많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신주쿠(新宿) 근처에 집을 구한다. 각자 회사에서 허용하는 야칭(家賃, 월세) 한도에 맞춰서 말이다.
만약 집에 중·고등학생 자녀가 있다면, 도쿄한국학교나 국제학교가 있는 아케보노바시(曙橋) 부근도 좋은 선택지가 된다. 이 근방은 서울 여느 동네처럼 보습 학원들도 종류별로 즐비하다. 그래서 이 동네는 도쿄 여대 의대가 있어 조용할 것 같지만, 실은 학원으로 몰려드는 학생들로 꽤 시끄러운 동네라고 한다.
근처 신오쿠보(新大久保)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광장시장이나 서울마트처럼 차례나 제사 재료까지 살 수 있는 한식 마트가 있고, 설렁탕, 순대국, 삼겹살, 떡볶이, 김밥 등 없는 한식이 없다. 한국인 의사가 진료하는 내과까지, 신주쿠를 중심으로 두어 정거장 내에 이 모든 것이 모여 있다. 이곳에 살게 되면 '서울에서 사는 것과 별다를 바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게 괜히 싫었다. 신주쿠 근처에 살아야 지인들도 생기고, 밤에 한잔하며 수다라도 떨 수 있고, 주말에 골프 치러 가는 모임이라도 만들 수 있다는 후배의 진심 어린 조언에도 귀를 닫았다. 사실 처음 집을 보러 다닐 때부터 신주쿠를 건너뛴 더 현실적인 이유는, 그 주변 월세가 너무 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신 회사 인근인 아카사카(赤坂), 히로오(広尾) 등을 둘러봤다. 대체로 20평이 조금 넘는 빌라형 아파트들이었다. 동네가 조용해서 좋긴 한데, 마음이 확 당기지는 않았다. 한 곳은 오모테산도(表参道) 역 바로 옆에 있는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의 25층이었다. 위치로도, 높이로도 마음이 확 끌렸지만 평수가 11평 남짓이었다. 킹사이즈 침대 하나를 들여놓고 나면 다른 도리가 없는, 딱 일본 비즈니스호텔 사이즈였다. 물론 패스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본 곳이 바로 이곳, 츠키시마(月島)의 주상 복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거실이나 안방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뷰는 벚꽃길과 스미다강(隅田川)이 하나로 이어지는 풍경이었다. 그냥 여기로 결정했다. 아마 일본말로 '히토메보레(一目惚れ, 첫눈에 반함)'였을 거다. 그런데 4월이 아니었으면 여기로 정하지는 않았을거다.
작년(2024년) 3월 말,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계열사 근무를 통보 받았다. 오래 준비했던 게 아니라 2월 말에 해외 근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한 달 만에 결정을 해 주었으니, 사실 긴가민가하는 가운데 준비를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해외 계열사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비자 나오는데 4주에서 6주 정도 걸린다고 했다. 마음만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몰라서, 어차피 길어야 6주 뒤에는 가야 하는 거라 닥치는 대로 하기로 했다. 우선 재류자격인정 증명서 신청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면서 사람 관계를 정리하고 집을 정리해야만 했다.
사람 관계야 "도쿄 가게 됐어, 꼭 놀러 와" 등등 나쁘지 않은 신변의 변화를 보고하는 거라, 시간이 닿는 한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포인트였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집 정리는 좀 복잡했다.
서울 집을 정리하는 것에는 도쿄에 따라가지 않는 아들 둘의 살 집을 마련해야 하고, 18년 한 집에서 산 까닭에 눈에 보이는 살림부터 안 보이게 구석구석 숨어 있는 살림까지, 알고 보면 우리 가족과 긴 시간을 함께한 애정과 금전의 결정체들을 내다 버려 하는 등등이 있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난감한 주제였었다. 아들들 거처 구하는 것도 지금 사는 패턴을 바꾸는 것이라 학교나 직장으로부터 거리, 방크기, 예산 범위 등 하나라도 가볍게 여길 것이 없었다. 이게 1순위다 보니 살림들은 배 타고 일본까지 같이 갈 침대 등 몇 놈을 제외하고는, 시간이 닥쳐서는 대부분 일괄 폐기라는 처분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애정이나 가격의 높낮이를 재서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게 재류자격 인정 증명서가 언제 발급될 수 있느냐 였다. 비자가 없으면 법적으로 등기 이사로 신고할 수도 없고, 일본 내에서 근무하고도 현지에서는 급여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연락될 때마다 매번 증명서 언제 나오느냐고 물어보았는데, 늘 답이 애매했다. “빨리 나올 수도 있고, 좀 늦을 수도 있다”고 했다. 참….
이건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는 게 맞을 거 같다. 최종적으로 재류자격 인정 증명서가 나오는데 90일 이상이 걸려서 7월 중순에 나왔고, 비자를 내고 본격적으로 일본에 근무하게 된 것은 작년 7월 말 정도였다.
처음에 4~6주 걸린다는 말만 믿고, 정말 갑자기 떨어진 특집 프로그램 준비 하듯이 정신 없이 뛰어 다녔다. 그런데 4월 말, 5월 말이 되어도 시간은 가고 일본에서는 연락이 없어 내가 공중에 붕 떠버린 상황이 되었다. 주위에서 "왜 안 가지? 무슨 문제 있나?" 하고 걱정들을 하기 시작했고, 아내도 그 사이 하던 일을 관두고 주위에 인사를 다 돌렸는데 시간이 지나자 나랑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같은 질문을 받고 같은 대답을 반복하게 되니 슬슬 사람을 피하게 될 정도였다.
5월 말이 되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본사 담당 부서에서는 그냥 6월 1일에 원격으로라도 일을 시작하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5월 말에 도쿄로 들어가 전임자에게 인수 인계를 받고 업무를 개시했다. 결국 재택 근무를 하는 셈인데, 해외 지사를 간단한 인수인계로 업무를 개시하는 게 참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대략 매일 아침과 저녁에 zoom으로 영상 회의를 하고 통화나 카톡으로 업무 연락도 받았는데, 정말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었다.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미를 이해 하는 데만 2박3일이 걸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의 발단은 현지 회사의 담당 부장의 애매한 답변이었다. 비자 업무를 대행해 주는 행정서사의 '1개월에서 3개월 걸린다'는 답변을 받아 그냥 그대로 전달한 것이다. 여기에다 몇 년에 한 번 내 포지션을 교체하다 보니 그 이전의 경험으로는 4~6주 걸렸다는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건 잘못했다고 하기 보다 '영혼 없는' 일처리'라고 보는 게 맞을 거 같다.
집에서 근무하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비자 질문은 같은 답만 돌아오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6월 말부터는 직접 알아보기 시작했다.
코로나 이후 증명서 신청자가 폭증했지만, 서류 심사 인원은 전과 같기 때문에 코로나 전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고 하고, 재류관리청에서는 발급 기간에 대한 질문이 하도 많아서 분기별 증명서 실발급기간을 아예 발표하고 있다. (내가 작년에 처음 발견했을 때는 2023년 10~12월 자료였는데) 가장 최근인 2024년 10~12월 자료에는 재류 신청 목적을 교수, 공연, 종교, 결혼, 기술 등 36개 정도로 세분하고 있었다.
이중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부문이 내가 신청한 <경영·관리> 부문이다. 2024년 10월, 11월에 받았던 사람들은 무려 140~150일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그 외에도 <기능> 목적이나, <가족 체재> 목적이 100일 가까이 걸린다고 되어 있다. <유학>의 경우는 30일에서 60일 정도이다. 작년 통계보다도 더 늘어난 것이다. 아는 분을 통해 알아보니, <경영·관리>가 유독 오래 걸리는 이유는 이 부분에 자영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일본에 와서 자영업을 하려는 외국인이 많다는 거다.
참, 나에게는 삶의 공간을 이전하는 몇 달의 시간이 굉장히 예민하고 동시에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감이 극도로 고조되는 시기였지만, 실제로는 재류자격 인정 증명서라는 벽에 막혀 한 발도 앞으로 못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