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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옆집언니 Apr 01. 2021

시부모의 가스라이팅.

결혼은 두 남녀 모두가 처음 겪는 일입니다. 연애를 짧게 했어도 길게 했어도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고들 말합니다. 몇십 년을 따로 살던 두 사람이 갑자기 한집에서 모든 생각과 생활을 공유하며 함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로 많은 것을 양보하고 배려하며 맞춰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시부모까지 달려든다면 며느리는 말 그대로 "녹다운" 무너집니다. 결국 아들의 결혼생활은 평탄할 수 없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 폐백 시간에 시부모님이 해주시던 덕담이 생각납니다. "너희도 그렇지만 우리도 어릴 때 만나서 연애를 오래 했거든. 서로 다 알고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같이 살아보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그래서 많이 싸웠어. 너희도 아마 그럴 텐데 그럴 때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고 하나씩 천천히 맞춰나가면 잘 살 수 있을 거야. 잘살아라 우리 아들, 우리 며느리." 너무 좋은 말씀이죠? 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며 시가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저는 이 말을 인용해 신랑과 싸웠습니다. "그때 그러셨잖아. 그렇게 오래 만난 우리도 가끔 별거 아닌 사소한 일로도 서투닥거리는데, 내가 어떻게 갑자기 만난 자기 부모님 마음에 들게 다 맞출 수 있겠냐고! 제발 말도 안 되는 욕심부리지 마시라고 해." 이렇게 말이에요.


저의 시부모님은 이미 '우리는 좋은 시부 모니까 며느리가 우리한테 무척 잘할 거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온갖 기대를 잔뜩 하고 계셨고, 저는 충분히 열심히 했고, 다른 어떤 며느리들과 비교해도 특별히 무언가를 잘못하거나 부족하게 한 게 없었는데도 시부모님에게 늘 기대에 못 미치는 모자란 며느리였습니다. 더욱 답답한 것은 모든 화살은 언제나 저에게만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항상 남편이 아닌 저에게만 서운하다고 하셨습니다. 남편은 저와 모든 걸 함께 했는데도, 모든 순간 그분들의 아들은 쏙 빠져있었습니다.


저를 괴롭히는 시부모님의 논리는 이러했습니다.


우리는 며느리랑 잘 지낼 거야 -> 우리는 좋은 시부모야 -> 그러니까 며느리가 우리한테 잘해야 해 -> 자꾸 어긋나는 걸 보니 며느리가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네, 성격이 예민하고 문제가 있어 (며느리 탓) -> 우리는 며느리를 실컷 예뻐하고 뒤통수 맞아서 너무 큰 상처를 받았고 굉장히 힘들어 (잘못 없음과 억울함 어필)


숨이 턱 막히죠? 저는 이런 것이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을 정신과 상담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었습니다. 바로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주입하여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스라이팅이라고 해요. 시부모들의 가장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방식은 이렇습니다.


결혼했으니 우리는 이제 한 가족이야 (상황 통제) ->  며느리인 너는 시부모인 우리에게 이렇게 해야 해 (강요) -> 거부한다면 네가 굉장히 부족하고 큰 잘못을 하는 거야 (세뇌)


그래서 "나 정도면 좋은 시어머니야, 내가 너한테 이렇게 잘해주잖니. 그러니 너도 우리에게 이만큼 해야지."는 무척이나 흔한 시어머니들의 단골 멘트입니다. 각자 시부모님의 사고 회로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많은 며느리들이 시부모님으로부터 이렇게 가스라이팅을 당합니다.


특히나 저의 시부모님은 아들에게도 눈물을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하셨습니다. 30년 가까이 "우리는 좋은 시부모가 될 거야. 그러니 며느리는 우리한테 잘해야 해"라고 세뇌당했던 남편은 처음에는 저에게 화를 냈었습니다. 하지만 정신과 상담과 부부 문제 상담소를 통해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실을 깨닫고 많이 변했습니다. 남편, 남자라는 사람도 참 이상해요. 똑같은 말을 제가 열 번, 스무 번 했음에도 꿈쩍도 안 하던 사람이 의사와 상담사의 말 몇 마디에 "그래, 바로 그거야."하고 변하더라고요. 물론 그러니까 그나마라도 저희의 결혼생활이 여태껏 유지되고는 있는 거겠지만요. 그래서 원래 시부모와의 갈등은 남편이 내편이어야 버티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에는 이혼, 그래서 남편내편을 안 들면 못 산다고들 하나 봐요.


어릴 적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이것만 다 보고 숙제해야지'라는 생각으로 TV를 한창 보고 있을 때 엄마가 소리쳤습니다. "TV 그만보고 숙제해! 언제까지 볼 거야 얼른 꺼!"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갑자기 원래 하려던 숙제도 하기가 싫어지는 거죠. 알아서 하려고 했는데 엄마의 재촉이 괜한 잔소리로 느껴지며 묘한 반항심까지 생겼던 이 경험은 누구나 학창 시절 겪어봤을 일이잖아요. 그런데 시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보통의 며느리들은 어른다운 어른, 좋은 시부모를 만나면 자연스레 존경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며 잘 따르게 되지요. 하지만 모든 일을 본인들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며느리를 아랫사람이라 여겨 강요하고 압박하며 심지어 예의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하는 시부모를 만난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이 나라에 살며 며느리의 도리라고 학습되어왔기 때문에 '며느리니까' 해야 하는 일들조차도 하려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잖아요. 너무나도 당연한 만고의 진리인 이 사실을 시부모가 되면 까맣게 잊어버리나 봅니다. 부모일지라도 연장자일지라도 그 누구도 타인을 세뇌시키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한쪽이 무조건 다 잦추고 희생하는 관계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입니다. 진정으로 오래갈 수 없는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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