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 날은 단순히 한 국가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간 억압받았던 한국인의 문화, 전통, 그리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시작점이었다.
특히 무술 분야에서는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한국 고유의 무예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게 나타났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의 전통 무예는 금지되거나 왜곡되어 전승의 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으나, 광복 이후 이를 복원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1.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다양한 무술 도장이 설립되고, 각기 다른 무술 철학과 기술 체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전통 무예와 외래 무술이 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무술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태권도이다.
태권도는 현재 전 세계 215여 개국에서 수련되고 있으며,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자리매김하여 한국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2.
• 광복 이후 무술계의 상황
광복 이후의 한국 무술계는 혼란과 재건의 시기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고, 이는 무술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통 무예인 택견, 수박, 궁술 등은 금지되거나 일본의 무술로 대체되었다3. 가라테, 검도, 유도와 같은 일본 무술이 학교 교육과 군사 훈련에 도입되면서 한국의 전통 무예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복은 한국 무술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
광복 직후 한국인들은 잃어버린 전통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오랜 억압으로 인해 전통 무예의 계보와 기술이 많이 단절된 상태였다. 이를 복원하기 위한 자료나 사범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무술인들은 남아있는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무술을 만들어내거나 외래 무술과의 융합을 시도하였다4.
이러한 노력은 한국 무술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무술계의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기도 했다.
• 다양한 관(館)의 설립과 발전
1945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여러 무술 도장이 설립되었다. 이들은 주로 '관(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자신들만의 무술 철학과 기술 체계를 구축하였다.
대표적인 관으로는 송무관, 무덕관, 청도관, 지도관, 창무관 등이 있다5.
• 송무관: 1946년 최홍희 장군에 의해 설립되었다. 최홍희는 가라테와 한국 전통 무예인 택견을 결합하여 새로운 무술 체계를 개발하였다. 그는 무술을 단순한 체력 단련이 아니라 정신 수양의 도구로 인식하여, 무예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6.
• 무덕관: 원광식 사범이 1946년에 설립하였다. 그는 중국 권법과 한국 전통 무예를 통합하여 독자적인 무술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무덕관은 이후 합기도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7.
• 청도관: 이원국 사범이 1944년에 설립한 도장으로, 광복 이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청도관은 가라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를 한국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였다8.
각 관은 자신들만의 기술과 교육 방식을 개발하였으며, 이는 한국 무술의 다양성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각 관마다 사용하는 용어와 기술 체계가 달라 수련자들 사이에 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무술계 전체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 무술 통합을 향한 노력
무술계의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되었다. 다양한 관의 지도자들은 무술의 명칭과 기술을 통일하여 한국 무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9.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55년에는 여러 관의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가장 큰 쟁점은 무술의 명칭이었다. 당시 각 관은 자신들만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는 무술의 통일성 확보에 장애물이 되었다.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태권도'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는 '태(跆, 발)', '권(拳, 주먹)', '도(道, 길)'를 합친 것으로, 손과 발을 사용하는 무술의 길을 의미한다10.
이는 한국 무술의 특징을 잘 담아낸 명칭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이날 회의에 참가한 손덕성, 이형근, 조경규 등 3명이 대통령의 승인을 받기 위해 대표로 경무대를 방문했다
. 그러나 바로 그날 김창룡 특무대 대장이 암살되는 바람에 이 면담은 취소되었다.
몇 달 후, 이승만 대통령은 친필로 태권도라는 휘호를 내렸다. 위 3개의 기사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휘호, 태권도의 명칭의 유래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서, 진실을 증언할, 최홍희, 이준규, 엄운규, 강원식, 박해만, 강병원, 등 당수, 가라데, 택견 등을 가르친 1세대 원로들이다.
이중, 대부분 고인이 되었고
현재, 강원식(국기원 초대 원장으로, 요양병원에 입원 중)
박해만 원로(1933~ 2024년 현재 만 91세) 만이 유일한 생존해 계시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프란페스카 여사, 경무대 곽영주 앞에서 최초로 태권도라는 명칭아래 호신술을 선보인 사진과 함께, 태권도라고 써주신 "우남 이승만 대통령령의 휘호와 관련된 진실을 증언해줄 유일한 증인이다" 세계태권도평화연맹" 허영재 상임고문은 말했다.
1955년 4월 11일 이날이 바로 태권도의 탄생일로 태권도의 날이 되었다.(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TAEKWONDO American dream 이호성 스포츠조선1995:86∼87)
명칭의 통일과 함께 기술의 표준화 작업도 이루어졌다. 각 관의 대표들은 공통된 기술 체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이를 위해 합동 수련과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각 관의 고유한 철학과 기술적 차이로 인해 완전한 통합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력은 태권도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