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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Apr 09. 2020

나의 예체능 사랑이 음주가무로만 남게 된 이유

요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다 갑자기 든 생각 정리

어릴 때부터 예체능을 동경하고 좋아했던 나는 피아노 학원도 오래 다니고 미술 과외도 받았다.


피아노는 내가 들어도 진짜 못 들어줄 정도로 못 쳤는데 그래도 너무 좋아 꿋꿋하게 다녔고 결국 바흐에 들어가니 그건 노력으로 안 되겠는 상황이라 그만 뒀다. 사실 그 전에 이미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미술도 엄청 좋아해서 과외 수업마다 열심히 그렸고 소묘 크로키 스케치 수채화 (유화 빼곤 거의 다 한듯) 여러 가지 하다가 중학교 땐 크로키 동아리도 들어갔으나 중고등학교 미술 수행 평가에서 모조리 C를 받았고 잘해야 B였다(첫 중학교 수행평가는 그래서 여전히 충격으로 남아있다. 난 미술학도였다고!).


이외에 노래방도 그렇게 좋아해서 초딩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뻔질라게 다녔지만 엄빠가 나보고 노래를 하도 못 부른다 해서 결국 마이크 잡는 걸 포기했고 난 그 이후로 자의로 노래방에 가본 적도 없고 남들 앞에서 마이크 들고 노래 부른 적도 없다.


춤도 그렇게 좋아해서 초5 때 매주 장기자랑을 비디오 녹화 떠서 토요일 이럴 때마다 틀어주던 시절이 있었는데 거기에 참가해 주얼리 어게인 춤을 출 정도로, 집에서 거울모드로 춤을 연습할 정도로,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사양 않고(먼저 나서진 않음) 장기자랑에 나가 춤 출 정도로 춤을 좋아했지만 나도 내가 춤을 못 춘다는 걸 친구들의 놀림과 고등학교 때 녹화된 장기자랑 영상을 보며 뼈맞는 아픔으로 알게 됐다. 잘 추는 애들과 난 달랐다.


(체육은.. 내가 원하는 딱 그만큼 잘했다. 웬만한 체력장도 늘 1급이었고 수행평가도 거의 A였다.)

그런 나는.. 결국 거의 모든 걸 포기했지만 과거의 내 예체능 사랑은 끝내 음주가무로 남게 됐다. 평소에도 흥얼 거리는 노래를 술을 마시면 각잡고 노래를 좀더 크게 부르고 춤은 몸에 시동을 걸기 시작하고 앉은 채로 상체를 흔들다 결국 엉덩이를 떼고 춤을 추다 결국 남에게까지 손을 뻗어 함께 춤을 추는 내가 돼 버렸다.

시간이 흘러 흘러 여전히 내 예체능 사랑은 문득 문득 또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 지금은 예전보다 맨 정신에도 좀 더 소리 높여 노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얼마 전엔 크레파스를 사서 매일 그림 한 장씩 그리게 됐다. 춤도 맨 정신에도 춘다.


예전에 드로잉 클래스를 연 인터뷰이의 말이 아직도 나에게 크게 남아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학교 같은 데서 그림을 너무 많이 평가하다보니 사람들은 자기가 그림을 잘 못 그린다고 쉽게 여기고 그래서 쉽게 펜을 놓는다고. 근데 사실 그거 다 상관 없고 (마치 생활 체육처럼) 그냥 그리고 싶은 대로 마음껏 자연스럽게 그리는 게 맞다고. 그 말을 듣고 참 많이 용기를 얻었고 그래서 몇 달 전엔 4B 연필과 크로키북을 샀고 최근에는 다시 크레파스를 들었다.

못 그리지만 난 기분이 좋다구!


마트에서 크레파스를 사면서 그 근처에 걸려 있던 아주 귀여운 곰돌이 스티커 한 장을 샀다. 좀더 어릴 땐 이런 귀엽고 소소한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는데, 점점 나를 더 돌보고 가꾸는 것에 관심이 커지면서 작게나마 소소하게나마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아낌 없이 손이 간다. 작지만 아주 사소하지만 아이패드에 붙여놓고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스티커, 매일 써서 매일 보면 기분 좋은 컵, 좋은 냄새가 나는 스케치북, 그 스케치북에 언제든 북북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크레파스, 나 자신 말고도 가꾸면서 함께 행복한 식물들.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잘 돌보아지고 가꾸어진 그런 것들을 보면 너무 행복해지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좋아했던 걸 굳이 꼭 어떤 진로나 미래나 뭐 이런 걸로 발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나 그만큼 좋아하거나 잘하면 미래와 연결을 시켜야만 한다는 그런 강박 전에, 그거 자체로 그냥 그거 그대로 잘 즐기고 좋아할 수 있게끔 됐어야 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랬다면, 나는 책도 공부도 좋아했던 아이였지만 예체능도 너무너무 좋아했던 아이였기 때문에, 피아노든 그림이든 너무 못한다는 평가와 판단 없이, 그래서 자신감을 너무 잃어 다시는 할 용기를 갖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은 채, 오래 오래 지금까지 좋아하면서 치고 그리고 부르고 추고 그러고 있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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