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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May 12. 2016

피해자⋂가해자

몇 대학의 폭력적 문화에 부쳐

얼마 전, 트웬티에 실명으로 기고된 서울예대의 폭력 문화에 대한 고발로 시끌했다. 같은 주제로 이야기한 토론에서 한 참여자는 '보통 갓 전역한 예비군들이 이런 군대(폭력) 문화를 전하지 않냐'고 했다.


떠올려 보면, 한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오면서 무수한 폭력적 문화를 마주해왔다. 그 문화는 무언가 묘하게 군대 문화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들은 내 주변집단이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군대를 많이 다녀오던 시기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무 살 무렵 이후보다 어린 시절에 더욱 처참하게 겪었다. 그 문화는 때로는 교육 제도의 일환으로 정당화 되었고 때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 됐다. 몇 가지는 버틸 수 없을 정도였지만 대부분은 사실 '버틸만한 정도'였다.


언제나, 또 어딜가나 마주하기 쉬운데다 버틸만 하다는 것은. 


어떤 이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잘 교육되어, 이것이 폭력적인 문화인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알지만 견딜만 하기 때문에, 혹은 다들 그러니까, 대수롭지 않게 눈 감는다. 또 어떤 이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닌 걸 알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다.  


견딜만했던 문화에서 나는 어땠을까. 



7월 17일의 대면식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총 학생회장이었다. 총 학생회장이 되자 작년 학생회장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다닌 중학교 인근 지역의 학생회장들이 모이는 '연합'이 있다고 했다. 연합이 아우르는 중학교의 수는 꽤 많았다. 나는 7기였다. 모임은 회비도 걷고 정기적으로 모였다. 윗 기수들과 친분이 끊기지 않도록 전체 모임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 해의 행사 살림은 막내 기수의 바로 윗 기수가 주최하는 등 꽤 체계적이었다. 내가 7기였으니 그때 1기는 22살이었다. 


당시 연합은 공휴일을 모임의 큰 행사 일정으로 잡곤 했다. 그 중 7월 17일은 대면식이 있는 날이었다. 막내 기수가 윗 기수들-선배들이라고 했다-에게 인사를 하는 그런 행사였다. 연합의 7기였던 16살의 나는 7월 17일, 대구 동성로의 큰 공원에 도착했다. 7기들은 공원 한 가운데 일렬횡대로 섰다. 반대편엔 윗 기수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마주봤다. 7기 중 가장 끝에 서 있던 친구부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어느 중학교 7기 누구 입니다, 따위의 고성이 공원을 가로질렀다. 목소리는 커야 했다. 작으면 다시 외쳐야 했다. 심장이 콩닥콩닥 거리고 무서웠지만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원래 목소리가 크고 밝았던 나는 어쨌든 버틸 수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윗 기수들은 우리를 다독였다. 함께 밥을 먹었다. 마치 비로소 일원이 됐다는 느낌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후, 7기의 한 친구가 연합 클럽에 글을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그곳에서, 일종의 신고식을 해야 하는 강압적 문화를 이해할 수 없었고, 힘들었다고. 그 후의 이야기는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었다. 어떤 선배는 '좋은 말'로 다독였고 어떤 선배는 욕을 하면서 '형으로서 말해 봐야겠다'고 했다. 당시의 나는 그 친구가 느꼈던 감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걸 왜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공론화를 시킨 친구의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별난 친구. 특이한 친구. 그 친구를 욕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 느낌의 충분한 근거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학생회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학급 실장이 됐다. 실장은 자동으로 학생회에 소속됐다. 실장이 되고 처음 모인 학생회 모임에서 1학년인 우리는 앞에 나가 의자에 앉아있는 선배들을 향해 외쳐야 했다. 저는 1학년 몇 반 실장 누구입니다. 이 신고식은 중학교 때 '연합'의 신고식보다 더 무서웠고 엄격했다. 소리가 작으면 몇 번이고 다시 외쳐야 했다. 선배들의 '다시. 다시.'의 소리가 무서웠다. 목소리가 작거나 내성적인 친구들은 힘들어했다. 나는 또 견딜만 했다.


연합의 군기는 학생회 군기에 비하면 애교였다. 우리는 학생회 뱃지를 반드시 교복에 달아야 했고, 뱃지를 달고 있는 선배면 누군지 몰라도 무조건 먼저 인사해야 했다. 만약 몇 1학년들이 인사를 잘하지 않았다면(혹은 그렇다고 트집을 잡았다면), 우리는 곧 소집됐다. 운동장에 열중쉬어 자세로 한참을 혼나기도 했다. 무언가 중학교 3학년 때 연합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조금 달랐다. 소집되어 혼나는 이유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는 인사를 먼저 해야 할까, 저 사람들도 인사를 먼저 하지 않는데. 때로는 하지도 않은 행동으로 불려 혼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지만 잊을 만하면 우리는 소집됐다. 


심지어 기숙사에 살고 있던 나는, 기숙사에서도 비슷한 과정으로 소집됐다. 학생회와 기숙사. 몇 번의 소집이 반복되고 나니, 이제는 내가 무엇 때문에 혼나는지도, 혹은 누구 때문에 연대 책임을 지고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특정하지 않은 다수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내고 있는 저 선배들은, 알까, 본인들이 왜 화를 내고 있는지. 연합 때에 비해서는 분노가 조금씩 쌓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견딜만 했다. 견뎌야 했다. 


결국 연합을 떠났고, 학생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동으로 떠나게 됐다. 



인정하고, 반성할 시간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문화를 공유하는 사회 내부는 착한 피해자와 나쁜 가해자로만 나뉘어 있을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가해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혹은 가해의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말로 내뱉고 싶지 않아서, 가해의 이야기도 그들의 피해의 이야기들과 함께 잠식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는 언제나 오롯이 피해자였을까. 폭력적 문화를 겪었지만 동시에 나는 가해자였다. 적극적 가해였든 소극적 가해였든. 그런 문화를 적극적으로 이어갔든 모른 척 넘겼든. 나보다 학년과 나이가 어린 친구들을 소집했든 군기를 잡는 친구 뒤에 숨어있었든. 때로는 적극적으로 방관하며 문화를 이어갔다. 기억은 온통 뒤섞였다. 때로는 체념하듯 뒤에 숨어 반복되는 문화를 눈 감았다. 어떤 문화엔 분노하면서 어떤 문화엔 무감각했다. 선택적으로 분노하고, 선택적으로 자기합리화에 빠졌다. 그 탓에 내가 거쳐온 폭력적 문화는 결국 사라지지 못했다. 결국 동시에 나는 가해자이기도 했다.


이후 대학에 입학했고 운이 좋아 멀쩡한⏤좋은 이라고 썼다 지웠다⏤ 문화를 공유하는 과에서 생활하게 됐다. 그제서야 분명하게 깨닫게 됐다. 때론 나도 가해자였구나. 나도 결국 누군가를 가해했었구나. 피해자의 위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눈 감았던 문화에 누군가는 또다시 견딜만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결국 퉁겨져 나갔겠구나. 이놈의 지긋지긋한 문화를 이어가는 데 일조했구나. 내가 선택적으로 판단하는 동안에. 


충분히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을 수 있다. 인정하고, 떠올려보자. 반성하자. 좀 더 예민해지자. 더 나은, 멀쩡한 문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동일한 배경에 동일한 교복을 입고 비슷한 구도로 군기를 잡히던 그 기억들은 자주 뒤섞였다. 그때 내가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 구분조차 하기 힘들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당한 것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잘못은 잊어버리기 쉽다. 그때 나는 가해자였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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