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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Mar 24. 2023

대충 살자~

나는 인생에서 대부분의 것들을 대충한다. 왠지 대충하는 법이 없다 라고 써야 맞는 문장 같은데 보통 대충한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것과 대충하는 건 조금 다르다. 대충한다고 해서 열심히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대충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열심히 한다. 물론 가끔은 열심히도 하지 않는데, 이건 주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밀이다. 비밀이 아닌가?


대략 백 스물 두어 가지의 인생 지론 중 하나는 완벽하게 하기 위해 너무 노력하면 시작도 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완벽하게 한다고 해서 늘 결과물이 좋다는 걸 담보하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충한다. 일을 열심히는 하지만 가끔 필요할 땐 대충한다. 그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길게 가져 가야 할 어떤 거라면 더더욱 대충한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일도 가끔은 대충하고 (그래야 보이는 게 있다, 진짜다) 팟캐스트도 대충한다(그래서 오래 하고 있다). 운동도 어차피 국대 할 거 아니니까 대충한다. 대충을 더 정확하게 풀이해보자면, 그 시간만큼은 열심히 임하지만 어떤 태도에 대한 이야기랄까. 열심히는 하지만 어차피 엄청난 걸 성취할 필요는 없으니 대충한다. 패배주의와는 다르다. 대충을 좋게 말하면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어쩌고일까? 누가 봐도 완벽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어째서 심리 상담 검사에서는 완벽주의 성향이 나왔는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무튼. 올해 새로운 운동을 두 가지나 시작했다. 하나는 발레고 하나는 탁구다. 두 가지 모두 대충하지 않으면 엄청난 자괴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운동이다. 발레 스튜디오에는 전면에 통유리가 붙어 있고 모든 수강생들이 거울을 보며 동작을 한다. 관절도 대충 만들어진 건지 엄청 뻣뻣한 나는 늘 다른 수강생들에 비해 스트레칭 때 다리도 덜 찢기고 상체도 덜 숙여진다. 근데 이런 건 별로 부끄럽지 않다. 정말 부끄러운 건 '그랑 바트망 드방'을 할 때인데 이 자세는 바 앞에 나와 서서 발을 앞으로 쫙쫙 뻗어 올리는 동작이다.

물론 수강생 모두 입문반 처지라 이 사진 다리 각도의 2/3도 안 되지만, 나는 유난히 다리가 올라가지 않는데다 심지어 다리가 짧고 무릎이 굽은 탓에 마치 키 작은 꼬마애가 얍얍 태권도 발차기를 하는 모양새다. 한번은 이 자세를 하다가 도저히 나를 보고 웃참에 실패해서 터지듯 웃다 혼자 머쓱해 하기도 했다. 내가 진정한 완벽주의자였으면 웃음 대신 분통이 터지지 않았을까? 당장 집에 통유리 설치해놓고 내내 연습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럴 걱정 없다. 나는 대충 사니까. 국립 무용단의 수석 무용수가 될 생각이 없는 나는 발레 수업이 끝난 후 티셔츠 등 부분이 조금 촉촉해지면 그걸로 된다. 오늘도 발레를 열심히 했네!


나의 대충 사는 법은 발레복에서도 드러난다. 입문반인데도 사람들은 발레복을 모두 갖춰 입고 있다. 발레 타이즈를 입고 그 위에 (저 수영복처럼 생긴) 레오파드를 모두 입고 있다. 그 반에 나 혼자서 맨날 자랑스런 젝시믹스와 안다르 로고가 박힌 필라테스 레깅스와 티셔츠를 입고 있다. 발레복을 검색 안 해본 건 아니다. 책 <아무튼, 발레>에서도 발레복을 맞추러 전문점에 간 에피소드를 읽을 땐 잠깐 솔깃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충이 이긴다. 그 어떤 운동과 활동에서도 장비를 갖춰 입지 않기로 유명하다. 중급반 정도가 되면 사야지.


탁구는 매주 월, 수 20분 씩 레슨이 있다. 보통 운동 레슨이라고 하면 적어도 40분에서 1시간까지 하니 뭐 그렇게 대충하는 법이 있지? 마음에 들어~ 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해보니 15분 째가 되면 탈진할 거 같은 게 탁구였다. 가장 고역은 선생님과 포핸드나 백핸드로 랠리를 칠 때인데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내가 잘 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몇 초 정도 짧은 시간 동안 리듬은 리듬대로 맞춰가며 채를 휘두르고 눈은 눈대로 왔다 갔다 하는 공을 계속 쫓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잡생각이 든다. '아.. 그 일 내일 어떻게 하지?'. 그럼 귀신 같이 공이 밖으로 빠지고 높이 튀고 네트에 걸린다. 그럼 내 손으로 내 머리를 콩콩 친다. 아 왜 딴 생각했어어어! 완벽주의자 아니라면서 왜 일을 생각하는데에에에! 잡생각만 아녔으면 30번 채우는데!!

잠깐.. 탁구도 대충해도 되는데 내 머리를 왜 때렸담~


레슨이 끝나고 탁구 연습을 하고 있으면 옆 탁구대에서 그야 말로 고인물 어르신들이 몸을 날려 가며 드라이브를 때리고 막는다. 서브 넣는 폼부터 예사롭지 않다. 다들 5년, 7년씩 했다니 말 다했다. 그들은 결코 대충해오지 않은 걸까? 도대체 어느 세월에 저렇게 될까 넋 놓고 보다 애인과 랠리를 시작하면 금세 화가 난다. 아니 왜 공을 일로 주냐고! 아니 니가 너무 옆에다 주잖아. 랠리를 하라고! 랠리랠리랠리 10번 채워야 돼, 알겠어? 대충해야 되는데 쉽지 않다. 다시 즐겁게 웃으면서 대충 친다. 대충해야 재밌게 오래 할 수 있어~


역시 글은 좋은 자기 성찰 수단이다. 쓰고 보니 왜 심리 검사에서 완벽주의 성향이 나왔는지 알겠다. 어쩌면 나만의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 아닐까? 안 그래도 거친 이 현대 사회에서 덜 고통 받고 덜 괴롭기 위해. 대충 살고 싶다 정말.


대충 살자 천진차이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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