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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May 14. 2023

새로운 집과 친해지길 바라

전세 사고 탈출 후 다시 선유도


"너, 그래, 집. 괜찮아?“


오랜만에 점심을 함께 먹은 전 팀장님이 ‘화곡동..’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팀장님 말고도 요근래 만나는 사람들마다 묻는다. 한동안 직접 만나지 못한 친구들도 연락으로 나와 내 집의 안녕을 묻는다.


최근 전국적으로 전세 사고와 사기 언저리쯤의 사건들이 우후죽순 터지고 있는 와중, 나는 그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전세 사고..기의 메카, 화곡동에 얼마 전까지 살고 있었다. 이젠 더이상 복기하고 싶지도 않은 그 지옥 같던 시간을 견뎌냈고 아무튼 결론적으로 나는 무사히 빠져 나왔다. 물론 많은 후유증을 안은 채. 또 물론 그 ’전세‘라는 제도가 근본적으로 가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퇴근 버스를 타고 화곡동 집 근처 정류장에 내리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집 초입으로 가는 6차선 도로. 버스에 내리면 늘 공교롭게 그 전 보행 신호가 마침 끝날 타이밍이라 대부분 도로 앞에서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신호를 기다리다보면 가끔 정신이 멍해졌다. 거대한 6차선 도로는 이내 더 거대한 사거리와 이어지고 있어 늘 차가 많았다. 퇴근길엔 다들 분노에 가득 차 클락션을 질세라 울려 댔고 더 문제는 배달 오토바이들이었다. 부아앙하는 배기음 소리, 끽- 하는 마찰음 소리. 거기에 매연과 함께 써라운드로 4d 체험을 하고 있으면 곧 보행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그때마다 난 매일 다짐했다. 다시는 이 동네에 살지 않으리. 발도 들이지 않으리.


돌이켜보면 4월부터 정말 정신 없이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정신으로 다 해냈는지 스스로가 기특하다. 빠듯한 일정에 강제로 맞춰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도 나는 신중하게 동네를 골랐다. 나와 애인의 회사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 화곡동처럼 전세 사고..기가 빈번하지 않은 곳, 비교적 조용한 곳. 사실 크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화곡동의 6차선 도로 앞에서 다시 선유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으니까.


선유도는 내가 2017년부터 19년까지 살았던 동네다. 조용하고 작은 동네. 한강과 안양천을 끼고 있는데도 크게 발전하지 않아 상권도 작고 교통편도 크게 좋지 않다. 누군가에겐 이런 점들이 동네가 별로인 이유이겠지만, 나에겐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건이다. 동네의 일부분인 한강 공원의 주말을 제외하곤, 동네가 늘 조용하고 사람이 별로 없다. 언제든 산책할 수 있는 한강과 안양천이 있다. 한강 공원 주변엔 카페 거리와 식당이 있다. 조금 걸으면 더블 역세권인 당산역이 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익숙하지 않은 매일의 노동을 끝내고, 주말엔 느즈막히 일어나 정처 없이 동네를 걸으며 한적함을 만끽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너무 그리웠기에 다른 동네를 더 알아볼 것도 없이 선유도로만 집을 보러 다녔다.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춘 집을 구하기 위해 이번에도 대략 서른 개가 넘는 집을 봤다. 그리고 지금 집을 골랐다. 아침부터 온종일 해가 들어오는 남서향. 뷰는 예쁘지 않지만 흔치 않게 앞이 뻥 뚫려 해가 깊게 들어오고 맞바람이 쳐 환기가 잘 되는 집. 예전 집보단 조금 좁지만 아담하고 깨끗한 집. 한강 공원과 좋은 카페가 바로 옆에 있는 집.


하지만 이런 좋은 집으로 이사를 앞두고도 나는 하나도 설레지 않았다. 모든 게 귀찮았다. 집을 꾸미고 싶다는 설렘과 기대 따위 정말 하나도 없었다.


4년 전 화곡동의 집을 구할 땐 엄청나게 부풀어 있었다. 대학생 시절 친구와 하우스 쉐어를 하던 때를 빼면, 스무 살 독립한 이래 처음으로 거실 빼고도 방이 두 개나 있는 집에 살아보는 거였다. 음식하는 곳과 자는 곳이 구분돼 있다니! 근데 거실까지 있다니! 게다가 그 직전 내가 산 곳은 5평 쯤 되는 좁디 좁은 원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부풀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집을 꾸며 나갈지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처음으로 쇼파를 사봤고 처음으로 냉장고를 내 돈 주고 샀다. 커텐, 책상, 의자, 식물. 하나씩 내 취향대로 채워 넣으며 뿌듯함을 만끽했다.


그리고 4년 뒤 지금. 하나도 설레지 않았다. 너무 힘들게 이사를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차피 여긴 내 집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게 됐기 때문일까? 아무리 내 취향대로 채우고 애정을 줘 봤자 2년 뒤엔 나갈지도 모를 곳이기 때문에? 전세의 쓴 맛을 봐버린 지금, 더이상 이 집에서 완벽한 평온함을 오롯이 느끼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2년 뒤가 벌써부터 걱정되기 때문에? 어차피 여긴 거쳐갈 집이라는 걸 너무나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이사를 온 지 일주일하고 반 정도 됐다. 회복 중이긴 하지만 약간의 불안 장애가 남았고 예전보다 훨씬 별 거 아닌 일에도 과할 정도로 깜짝 깜짝 놀란다. 불안 증세로 얻은 피부염은 돈 몇 백을 들여서 나아가고 있다. 피부염이 불러온 안구건조는 아직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 전보다 진심으로 행복하거나 기쁘지가 않다.. 라고 쓰면 너무 불행해 보이니까 다시 문장을 고쳐 쓰면, 아직 진심으로 편안하지 않다. 지금 집을 처음 보러 갔을 때도 너무 지친 나머지 온통 금칠 된 화장실마저 크게 경악하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그냥 허탈하게 비웃었다. 이사를 가고서도 내 집도 아닌데 돈을 들여 가며 그걸 왜 고치냐고 조소했다. 나보단 덜 지친 건지 애인은 그래도 2년간 내 집인데 기분 좋게 살아야지. 대꾸했다.


결국 하나씩 바꿨다. 오늘의집에서 요즘 트렌드라는 무광 사틴 세면대 수전과 휴지 걸이와 수건 걸이를 사 황금칠의 흔적을 지워냈다. 녹이 슬고 곰팡이 물 때까지 껴 버린 황금 해바라기 샤워기 수전도 갈아 치웠다. 교체를 위해 제품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르고(돈을 쓰는 거니까), 못을 하나씩 빼고 그 자리를 닦고 새로운 제품을 달고 다시 못을 조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조금씩 회복되는 거 같기도 하다.  나 역시, 내게 집안일은 몸에 새겨진 dna 같아서 마음은 설레지 않아도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쉬지 않고 쓸고 닦고 지우고 다듬는다. 약간 츤데레 같지만 결국 집에 잘 어울릴 새 수납장을 사고 러그를 깔고 TV스탠드를 조립했다.


애인도 계속해서 나를 동네로 끌고 나간다. 집에서 가라 앉고 있는 나를 데리고 꼬박 꼬박 밤산책을 하고 주말엔 한강에서 함께 자전거를 탄다. 낮엔 한강 공원을 산책하고 카페에 들른다. 어느 날 저녁 장을 두 손 가득 들고 돌아오는 길에 6차선 도로 대신 조용한 작은 도로 옆을 걸으며 이게 사는 거 아니냐며 나를 웃겼다. 우리가 얼마나 운 좋게 그 집을 탈출해 이렇게 좋은 동네와 좋은 집으로 왔는지 계속 떠올려 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예전만큼의 뿌듯함은 없다. 약간의 안도감과 함께 그냥 기본 정도를 하는 기분이다. 그래.. 아직은 이 집이 낯설고 어색해서 막 뿌듯하진 않은 거야. 한 집에서 4년 동안 너무 익숙해질 정도로 오래 살다가, 오랜만에 새로운 집으로 왔으니까. 아직은 좀 덜 편안하고 덜 뿌듯한 걸 거야. 아직 나도 집도 시간이 조금 필요한 걸 거야. 금방 편안해지겠지, 그렇게 또 집을 쓸고 닦고 다듬는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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