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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May 21. 2023

일단 뛰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날씨가 너무 좋았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할 생각으로 편한 옷을 입고 벙거지 모자를 쓰고 헤드폰을 끼고 한강 공원으로 걸었다. 보행자로에 도착해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 같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 한 무더기가 달리기를 하고 있다. 한 무더기가 지나가고 또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뒤따라 뛴다. 옷에 덧대어 입은 조끼를 보니 오늘 마라톤을 하나보다. 방화에서 여의도까지. 선유도 즈음이면 이미 한참 뛴 상황일 터라 사람들 얼굴은 땀범벅에 벌게져 있다.


마라톤 사람들 한 무더기에 어쩌다 애매하게 섞여 빠른 걸음을 하고 있자니 왠지 나도 함께 뛰고 싶었다. 마침 헤드폰에서도 신나는 음악이 나오고 있다. 의도한 건 아닌데 마침 또 울트라 부스트를 신고 있네.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끈을 조금 고쳐 매고 발목을 돌리고 휴대폰을 다시 그러 잡고.

일단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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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체력장을 정말 좋아했다. 일단 수업이 없다는 게 가장 좋았고 나의 운동 실력을 맘껏 뽐낼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아무도 관심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 홀로 온몸에 묘한 긴장감마저 흐를 정도로 체력장은 나만의 리그였다. 팔 굽혀 펴기, 오래 매달리기, 윗몸 일으켜기 등, 모든 종목에서 1급을 놓쳐 본 적이 없다. 철봉에 매달리자마자 떨어지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1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를 깍 깨물고 매달리다 친구들에게 저거 저거 진짜 독한 년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바래지 않는 내 체력이 늘 뿌듯했다.

딱 하나. 오래 달리기만 빼고.


나는 이상할 정도로 유난히 오래 달리기를 못했다. 단거리는 반대표를 나갈 정도로 잘했지만, 오래 달리기는 시작되면 거의 10초 만에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살면서 이렇게나 하기 싫고 힘든 게 또 있을까. 30초 정도 달리면 입 안에서 피맛이 굴렀다. 입은 마르고 숨이 가빠지고 머리는 팽팽 돌았다. 조금 더 뛰면 폐가 터질 거 같이 아팠다. '심폐 지구력'을 측정한다는데 대체 심폐 기능이 문젠지 지구력이 문젠지. 게다가 잘하는 애들이 많았다. '잘'의 수준까지 갈 것도 없이 나보다 나은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어떻게 저렇게 잘 뛰지? 나보다 잘 뛰는 아이들 꽁무니를 간신히 따라가다 몇 바퀴까지 차이가 나기 시작하면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걸었다.


짜증이 났다. 이렇게까지 못하는 운동이 없는데. 자아가 비대하고 경쟁심이 크던 10대. 적당히 못하면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노력이라도 했겠지만, 너무 못하니까 그냥 포기해 버렸다. 한다고 될 거 같지도 않았고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오래 달리기를 위해 굳이 짧지 않은 시간을 내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부턴 오래 달리기를 시작하면 그냥 걸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체력장 내내 오래 달리기를 제대로 해낸 적이 없다.


20대가 돼서도 똑같았다. 헬스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건 러닝 머신. 늘 숨이 턱까지 차 포기하고 싶을 때 액정을 쳐다보면 귀신 같이 10분도 되지 않는다. 한참 달리기가 유행이던 시절, 사람들끼리 크루를 만들어 경복궁과 한강 옆을 따라 뛴다는 그 멋지고 힙한 유행도 오래 달린다는 것 하나 때문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다 저 멀리 점멸하는 초록불 횡단보도를 향해 뛰기만 해도 가슴이 터질 거 같은데.


그런 내가 휴대폰에 런데이 앱을 깔게 된 건 인터넷 세상 어디에선가 본 글 두 개 때문이었다. 달리기가 우울한 감정을 해소시키는 데 좋다는 것. 그리고 러너스 하이(?)가 있다는 것. 공부만 하느라 우울감이 없던 입시 시절과 우울감만 있던 취준 시절을 지나, 적당한 열정과 약간의 우울감이 뒤섞인 직장인 n연차가 되면서 스스로 우울감을 조절할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합법적(?) 자극은 죄다 겪어 봐야 하는 경험주의자로서 러너스 하이라는 게 대체 뭔지 알고 싶었던 귀여운 욕망과 함께. 그렇게 집 근처 공원에서 초급자를 위한 8주 차 30분 달리기 완성 코스를 시작했다.


달리기는 생각보다 좋은 운동이었다. 일단 달리고 나면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해냈다는 성취감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기분이 좋았다. 다른 운동에 비해 옷이 중요하다거나 기구가 필요하지 않아 언제고 원할 때 나가서 뛰면 돼 간편하고 가벼웠다. 뛰면 뛸수록 잡생각과 우울감이 머리를 스쳐 가는 바람에 함께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일단 뛰는 내가 멋있다. 역시 운동은 자아도취지.


그래도 가장 좋은 건 역시 실생활의 변화다. 저 멀리 타야 할 버스를 위해 달려갈 때, 신호등을 빠르게 건너기 위해 뛸 때 더 이상 예전만큼 가슴이 아프고 힘들지 않다. 습습 후 후 두 번의 들숨과 두 번의 날숨. 그리고 규칙적인 팔과 다리의 박자. 숨과 몸의 리듬. 평생 나를 힘들게 한 오래 달리기를 나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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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은 달리기를 한참 못했다. 피부염 때문에 의사 선생님이 얼굴이 많이 붉어지는 운동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발레나 탁구는 거의 얼굴에 변화가 없는 반면, 유산소 운동인 달리기는 쉽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술을 먹지 않고 얼굴에 열을 쬐지 않는 것처럼 최대한 얼굴에 피가 몰리지 않게 악화 인자를 피하는 게 가장 중요한 치료 방법이란다. 어떤 사람들은 이 피부염 때문에 아예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데 어떻게든 나는 내 일상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안 할 순 없으니까. 그래서 달리기가 아닌 운동들만 했다.


내 옆을 지나쳐 가며 뛰는 사람들. 계절 중 가장 아름다울 지금의 한강. 오전 10시. 이 시간부터 해가 강한 늦봄과 여름 초입의 사이. 이미 26도의 한낮. 분명 뛰면 얼굴이 빨개질 거다. 정말 오랜만에 뛰어 잘 뛰지도 못할 거다. 그래도 다시 뛰고 싶다. 빨개진 얼굴은 금방 돌아올 거고 기분은 좋아질 거야. 길게 생각하지 않고

일단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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