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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Sep 16. 2023

오래된 것들에 대한 예찬, 그리고 사랑

나는 오래되고 낡은 것들을 좋아한다. 외할머니 댁 먼지가 수북한 찬장을 더듬거리며 오래된 잔을 찾아본다. 엄마 표현에 따르면 ‘잘 나갔을 시절’에 시원하게 구매한 무스탕을 보얗게 먼지 더께가 내려앉은 박스 속에서 찾았을 땐 기뻤다. 여행을 가면 꼭 시장에서 오래된 것들을 살펴본다. 늘 깨끗하고 새것만 좋아했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취향이 넓어졌는지는 아는 바 스스로도 없다.


빈티지나 구제, 세컨드 핸드, 중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오래된 것들. 그 속엔 지금 와서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희귀함이 있고, 누군가가 한때는 늘 들여다보고 어루만졌을 소중해함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내가 발견하게 되는 운명적 순간까지. 그런 과정이 모두 좋다.


스페인 여행을 하다 우연히 벼룩시장에 들렀다. 그보다 5년 전쯤 포르투갈에서 ‘도둑시장’을 들렀을 때 처음 보는 희귀함과 소중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쁜 찻잔, 아름다운 그림, 귀중해 보이는 책들. 켜켜이 쌓인 먼지를 살짝 털어내면 아주 멋진 것들이 보였다. 당시에도 꽤나 안정적인 수입을 버는 중이라 생각했으나 사회 초년생은 초년생이었던지 그런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돈을 쓸 여유는 없었다. 마치 쓸데없는 데 돈을 쓰는 것만 같았지.


그리고 5년이 흐른 스페인에서의 난 그보단 좀 여유가 있었다. 세상엔 꼭 필요하고 유용함으로 기능하는 사물만 있는 게 아니다. 이젠 알지. 벼룩시장엔 수많은 아름다운 찻잔과 접시와 컵과 책과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다. 이건 어떤 사연으로, 어떤 역사로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을까. 상상하는 것도 재밌다. 엄마는 그래서 무섭다고 했다. 자신이 온전히 알 수 없는 역사와 그 흔적들.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어차피 알 수 없는 역사, 내겐 즐거운 상상력이 더 힘이 세다.


신나게 둘러보다 도저히 내 시선을 거둘 수 없게 하는 한 접시가 있었다. 실은 두 개였다. 하나는 청포도 알알이 너무나 싱그럽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던 접시 하나. 그리고 접시 하나는 꽃과 이파리들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던 접시 하나. 두 개를 계속 들여다보며 저울질한다. 둘 다 너무 아름답다. 한 폭의 예술 작품이 그대로 접시에 수놓아져 있다. 국내에선 이런 접시들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 공장에서 찍어낸 접시가 아닌, 사람이 손으로 직접 그리고 칠한 접시. 두 개 모두 사는 건 돈으로나 무게로나 사치 같아 고민하다 결국 포도알 접시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지금 후회하지. 아 그것도 살 걸. 역시 사고 싶을 땐 사야 한다.


벼룩시장 상인에게 얼마냐 물으니 10유로란다. 한화로 대략 만 사오천 원 정도. 이런 시장에서 네고는 국룰이다. 아저씨도 만만치 않게 기싸움을 준비 중이었지만 왠지 네고를 하고 싶지 않아 졌다. 괜히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불편한 행위를 하고 싶지 않았달까. 물론 30유로 정도 불렀으면 계산기 앱을 켰겠지만.


얼마 전엔 우연히 파주의 헌 책방 카페에서도 오래된 것들을 만났다. 책을 사기만 하고 읽지는 않는다는 사람을 요샌 집책광공이라 한다든가. 아무튼 원래도 나는 책에 둘러 쌓여 있을 때 안정감과 설렘을 느끼는 사람인데 헌 책방은 더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지금은 절판된 수많은 책들, 책장을 넘기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은 고서들, 또 어느 나라에서 흘러 온 건지 알 수 없는 온갖 외국 서적들. 그 책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여기를 사랑하게 될 것임을, 운명의 책 한 권쯤은 만날 것 같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결국 책들 속에서 유홍준 교수가 90년도에 편역한 미학 에세이를 발견했다. 벽 한 켠에 100권이 넘게 꽂혀 있던 시공사 총서에서 재즈 편과 우주의 운명 편을 찾아냈다. 나중에 집에 와 검색해 보니 도시 미술 편이 있던데, 책방엔 그 편이 없었어서 아쉬웠다. 그리고 대자代子에게 주기 위해 무료 나눔 중이던 아동 도서 중 가장 모험적으로 보이던 아문센 편을 골라 왔다. 뿌듯하다. 미학 에세이를 펴다 누군가 책 사이 껴 놓은 종이를 발견했다. 누굴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공부했나 보다. 미학 에세이에 나오는 어려운 용어들이 메모돼 있다.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 희귀함. 그리고 한때는 누군가 매일 펼쳐 보며 공부했을 그 마음.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이런 연유에서 나온 오래된 것들에 대한 예찬, 그리고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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