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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Sep 09. 2023

결혼식 진짜 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결혼식을 하기 1편

“신부님, 발부터 들어가실게요.”


여기서 내 이름은 없다. 보통은 사회에서 이름으로 불리는데 어째 이 세계에 발을 들이고부터 나는 마치 익명의 신부님 123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며 드레스 숍 실장님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는데 뜨악했다. 어마무시한 하이힐이 놓여 있다. 무려 12cm. 처음엔 20cm인 줄 알았다. 이 구두에 ‘신는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아주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두에 ‘올라탄다’이다. 최근 나는 괜히 심심할 때 웨딩 슈즈를 검색해 보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정말로 살 생각은 없지만 왠지 이 기회에 좋은 구두 하나 구매해 보자며 3cm짜리 슬링백이니 발레리나 플랫 같은 걸 찾고 있었는데, 12cm요?


12cm 힐을 혼자 신는 건 불가능했다. 가뜩이나 힐을 신지 않아서 더 어려웠다. 게다가 힐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꼴을 했는데 그 이유는 마치 누가 간 밤에 술 취해 벗어놓은 것 같은, 마치 허물 같은 드레스 안에 힐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드레스 웜홀에 쏙 하고 들어 간 다음 실장님의 부축을 받아 겨우 힐에 올라탄다. 드레스 길이가 너무 길어 163cm인 내가 입었을 때 그나마 봐줄만하려면 이 정도 힐에 올라타야 한단다. 그렇게 겨우 드레스 속으로 들어가면 실장님이 드레스를 밑에서부터 주섬주섬 올려 입혀 준다. 그럼 짜잔~!


이 아니라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된다. 그 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유명한 장면. 그것처럼 실장님은 있는 힘껏 드레스를 당겨 뒤를 집어낸 다음 커다란 바늘 수십 개를 끼운다. 정말 갈비뼈가 으스러질 거 같다. 숨도 잘 못 쉬겠다. 이렇게 길고 작은 걸 입고 어떻게 사람들을 맞고 서 있고 걷고 춤을 추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실 수 있을까?




살면서 큼지막한 것들은 보통 주류에 속했다. 평범하게 정규 교육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대학교까지 졸업했다. 그 사이 몇 명의 남자와 연애를 했다. 학부 졸업 후 몇 년을 조금 놀다 취업을 했고 지금까지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있다. 반면 살면서 조그마한 것들에 대해선 보통 주류를 조금 벗어났다. 타고난 성격 탓에 남들과 비슷한 걸 잘 견디지 못했고 나만의 취향을 날카롭게 제련하기 위해 늘 나름의 세계에 푹 빠져 있다. 이를테면 코를 뚫고 타투를 하고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그런데, 이런 것들은 어렵지 않다. 큼지막한 것에서 착실히 주류를 따르면 자그마한 비주류 즈음이야 다들 귀엽게 봐준다. 그래서 크게 불편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그냥 좀 튀는 모범생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래서, 이제 와서, 한국인 인생의 주류 of 주류 왕인 ‘결혼’ 앞에서 아이러니하게 비주류를 택하려니 쉽지 않다. 방금도 친구가 추천해 준 웨딩 플랫폼에 채팅 한 번 걸었다가 제휴 플래너에게 전화로 꾸중을 들었다. (진짜로)


”신부님, 제가 보낸 링크에 드레스 업체도 보셨어요? 여기도 괜찮아요.“

- 아니.. 제가요. 아예 바닥에 안 끌리는 드레스를 입고 싶어서요..

“신부님. 거기 짧잖아요. 가격도 괜찮고 길이도 괜찮다니까요.”


플래너가 보낸 드레스 사진들은 여전히 바닥에 치렁치렁했다. 이 세계의 플래너에게 짧은 드레스란 이런 걸까. 식장 로드쯤은 다 쓸고 지나가야 긴 드레스인 걸까.




처음엔 이 험난한 길이 너무나 예상돼 아싸리 빈지노와 스테파니처럼 그냥 영등포구청 가서 도장이나 찍자 싶었는데, 막상 몇 년간은 여러 이유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게 돼 그것도 어렵게 됐다. 그래, 이왕 진짜 비주류처럼 혼인신고와 식 모두 생략해버리자 싶기도 했지만 그럼 결혼이 대체 뭐지? 부터 시작해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축하받고 싶은 마음도 커 결국 이 험난한 길을 스스로 택했다.


대부분 비슷한 단계를 밟는 이 사회에서 주옵주(주류 오브 주류ㅎ) 결혼에는 이미 견고한 템플릿이 있다. 이 거대한 세계는 이 템플릿에 맞춘 거대한 시장에 기반한다. 이른바 스드메라는 것을 하고.. 각각 따로 하면 비싼데 스드메로 묶으면 얼마가 할인되고.. 이 스드메에서 ‘스’를 맡고 있는 스튜디오는 ‘리허설 웨딩’이라고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결혼 전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 행위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결혼식을 하는데 결혼 전에 드레스를 왜 입으며 사진을 왜 찍는 거지? 의문이 생긴다. 먼저 결혼한 친구는 청첩장에 넣기 위함이라 했다. 그래? 그럼 어떻게든 셀프로 한 장 찍지 뭐. 그럼 ‘스’는 패스.


그다음은 드메의 ‘드’다. 각종 웨딩 플랫폼과 인스타그램 검색으로 보는 ‘드’는.. 너무나 끔찍했다. 당연히 누군가에겐 아름답겠지만 일단 내 취향이 전혀 아니다. 게다가 너무 불편해 보인다. 발이 묶이는 게 싫어 평소에 힐도 신지 않고 긴치마는 뒤를 튿는 수선을 맡겨 활동성을 만드는 내게 드레스는 너무 가혹하다. 게다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 드레스는 그만큼 값을 하기 마련이다. 몇 번 찾다 아 걍 또 하지 말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 때쯤 인스타그램 광고 알고리즘이 소름 끼치게 내 앞에 이 드레스 숍 광고를 가져다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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