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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Sep 30. 2023

남쪽의 억양

당근 거래를 하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얼마 안 가 어떤 장년 부부가 건너편 자리에 함께 앉았다. 이야기를 딱히 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가까이에 있어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게 몇 번이라꼬?"

"602번. 와?"

"적어놀라꼬. 그래야 나중에 내 혼자도 타지"

"가는 거 한번에 적어노소. 602번, 6716번"


몇 마디 안 되는 대화로도 알 수 있었다. 동향 사람들이다.


경북 의성 출신 아빠와 경북 안동 출신 엄마 밑에서 20년을 대구에서 자란 나. 같은 경상도 말씨여도 경북과 경남이 다르고, 의성과 안동과 대구 말이 다르다. 문득 말 끝마다 '-니껴'나 '-예'를 붙이곤 하는 엄마 말투가 떠올랐다. "그랬니껴?".


서울에 온 지 13년 차.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경상도에서 온 줄 잘 모른다. 어릴 때부터 남들 말투를 곧잘 따라하던 나는 서울말도 금방 따라했다. 아직도 누군가 사투리를 '고친다'라고 하면 발끈하는 나지만 실은 나도 그런 마음으로 서울말을 따라했다. 처음엔 조금 쑥스럽고 어색하게, 그러다 시간이 흐르니 자연스럽게 말씨가 입에 뱄다. 


인천 사람과 연애한 지 8년. 같이 산 지는 거의 5년. 이젠 서울 말씨가 더 익숙하다. 영어로 말할 땐 머릿속으로 생각을 자주 한다. 단어를 떠올리고 문장을 만들고 점검하고. 아주 짧고 쉬운 문장이어도 간편하게 나오는 법이 없다. 사투리는 어떨까. 글쎄 서울 말씨를 쓸 때 특별히 억양을 신경 쓰진 않는다, 이제는. 나 정말 서울 사람이 다 된 걸까?


대구에 가면 내 말투는 독특해진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땐 대구 말씨가 술술 나온다. 서울 말씨와 완전히 반대 되는 억양과 높낮이. '-캤', '-카' 같은 독특한 파열음들이 말과 말 사이에 붙고 '-나', '-노'가 문장을 끝낸다. 그러다가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나도 모르게 종업원들에겐 서울 말씨를 쓰게 된다. 말을 하면서 인지가 되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다시 대구 말씨를 쓰려고 하는데, 그러면서 억양이 꼬이고 이도저도 아닌 아주 독특한 말씨가 된다. 


재밌는 건 구어뿐 아니라 문자 말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 대구 친구들과 카톡을 할 땐 문장에 말과 동일한 파열음과 종결 어미가 붙는다. "ㅋㅋㅋㅋ 머라카노". 그러다 종종 서울 말씨도 섞인다. 서울 친구들과 카톡을 할 땐 카톡 역시 서울 말씨다. 여기까지 쓰다보니 알겠다. 지금의 내겐 서울 말씨가 디폴트다. 대구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대구 말씨를 쓰는 건 내가 어디 속해 있었는지를 떠올리는 일이며 그들과의 동질감과 친근함을 복기하기 위함이다. 


90년대 서울 사투리 영상을 보면 지금의 대중적인 서울 말씨와 완전히 다르다. 언어라는 건 참 재밌다. 30년 만에 말씨가 그렇게 바뀌다니. 가끔 조선시대나 삼국시대 사람들의 말투가 어땠을지 상상하곤 한다. 예전보다 산과 강이 만들어내는 경계가 옅어지고, 서울로 몰려와 삶의 인구 밀도는 높아지는 초연결 시대에 지금으로부터 30년 뒤의 사람들은 어떤 말씨를 쓰고 있을까. 나는 또 어떤 말씨를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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