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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터러시 멘토 Aug 19. 2022

말한다는 것 두 번째 이야기

우리 모두 쌈꾼

사춘기가 막 시작된 둘째가 캐나다에 사는 사촌들과 오랜만에 만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카톡을 보내곤 합니다.


“엄마, 내가 지금 온 게 잘못이었어.”

 

“지금 딱 사춘기 시작하는 때인데......”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다 더 잘해줬을 텐데......”

 

평소 동생들을 잘 보살피고, 그런 자신에 대해 자부심도 가지고 있던 아이인데, 어린 사촌 동생들이 고집을 피우거나, 막무가내로 조르거나, 심하게 놀릴 때 예전과 달리 받아주기 힘들어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가끔 울상이 되나 봅니다. 둘째는 심각하게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 아이의 입에서 ‘사춘기’, ‘사춘기’하는 게 여전히 귀엽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작 사춘기 아이들에게선 절대 나올 수 없는 멘트니까요.


본격적인 사춘기가 되면 그렇게 남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중학생들 간의 대화 장면을 멀리서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 친구들과 단체 전화 통화하는 첫째에게 무슨 대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구들이 정말 말을 잘 들어준다라고 했더니, 아이가 하는 말이 친구들도 자기만큼 떠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너 계속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친구들도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어.”

 

“......”


부모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아이가 친구들과는 밤새 수다를 떨 수 있다는 사실에 배신감도 들었지만, 다들 그렇게 떠든다고 하는 말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충고나 이해가 있는 대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말을 하고 싶은 거구나, 나도 너랑 같다는 것을 그냥 확인하고 싶은 거구나 싶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같은 대화라도 다 다른 가 봅니다. 누구에게는 감정 표현이 중요하고, 또 누구에게는 생각 표현이 중요합니다. 또 누구에게는 욕구 표현이 중요하고 또 누군가는 공감이 중요한 가 봅니다.


정말 뾰족하고 예민한 시기가 살짝 지나고 나니 이제 부모 앞에서도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사실 뒤돌아보면 뾰족한 시기에도 부모에게 듣기만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걸 못 참고 끼어들어 훈수를 두는 바람에 아이의 수다가 여러 번 좋지 않은 분위기로 끝난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가 조금 노련해져서 그냥 무조건 들어줘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부모 앞에서도 조금씩 수다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평소에 별로 관심이 없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합니다. 친구 문제, 학교 문제, 사회 문제 등 어느새 아이들의 관심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로 넓어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과는 질적으로 달라진 판단과 논리로 그 주제에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생각해보니 말을 하는 건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도, 사춘기 시절에도, 다 자라서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면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간혹 발표나 토론 교육을 많이 받은 초등학생들이 자신들이 소화하고 있는 내용인가 싶을 정도로 어려운 주제로 길게 말하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어른 옷을 입고 있는 아이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청소년 시기만 되어도 어른이 보기에도 간단하지 않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관심과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 어느덧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청소년들은 많은 주제에 대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과는 확연히 줄어든 수다 자리에 ‘토론’을 넣으면 좋은 것 같습니다. 독서토론 글쓰기 시간에도 그렇지만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이제는 수다를 넘어선 ‘의견’을 물어봐주면 아이들이 은근히 감동합니다. 나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 의견이 있는 한 인격이라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 이 시기에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존중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초등 3, 4학년 이상이 되면 아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대부분 ‘찬반토론’ 시간을 즐깁니다. 친구의 논리의 허점을 찾아 공격하는 것도 재미가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마구 쏟아내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다. 무력으로 싸울 수 없으니 입으로라도 하는 싸움이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편을 나눠 함께 싸우니 더 재밌습니다. 사실 ‘찬반토론’의 현장에 들어가 보면 아이들이 흥분한 것이 무색할 만큼 논리도 부족하고, 내용도 풍부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저는 이 시기 아이들이 뭔가에 몰두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함께 신이 납니다. 마음을 조금 열고 바라보면 논리는 많이 부족하고, 근거도 분명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의견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먹고 함께 결과를 만드는 토의를 하자고 열심히 준비해 와도, 아이들은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매번 ‘찬반토론’을 하며 한 판 붙어보고 싶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자신의 의견에 논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끝이 나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너무 좋은 가 봅니다. 한참 떠들고 나면 그 ‘주제’에 대해 진짜 관심이 생깁니다. 몇 년이 지나도 함께 싸웠던 그 주제에 대해선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생각의 길을 열고, 관심과 감각이 살리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인가 봅니다.  


청소년기가 무르익으면 의견을 내보이는 ‘토의’에도 제법 적응이 됩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토의’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사실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나의 의견을 피력하는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문화에서 ‘찬반토론’을 오랫동안 과도하게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자기표현의 기회를 누린다는 긍정적인 생각 뒤에 정작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한 데 모으고, 더 나은 무엇인가를 만드는 협력의 과정을 배우기가 힘든 현실로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 아이들을 쌈꾼에서 협력자로 바꾸는 ‘토의’ 문화, ‘토론’ 교육은 언제쯤 가능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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