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환승역에서 오늘 회사에 못 갈 것 같다고 전화를 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도움이 필요해서요.."
모든 게 복합적으로 폭발해 버렸다. 그래서 출근길 환승역에서 출근을 포기했다.
그리고 동네에서 정처 없이 걷다가 눈에 들어온 간판이 있었다.
공. 감. 정. 신. 건. 강. 의. 학. 과
공감처럼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냥 혼자는 역부족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건강한 정신을 갖기 위해 책, 영상, 명상, 운동 부단히 노력했지만 매번 같은 패턴으로 무너졌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노력이 없는 것 같이 느껴졌고, 누군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면 뭔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작정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원]
"요즘 자꾸 충동적 이어져요. 오늘도 출근길에 출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거거든요. 주변에 화도 많이 나고, 무엇보다 제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나요."
"상사들에게는 표정을 못 숨긴다, 너무 눈치를 안 본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그렇지만 같이 팀원으로 일했던 후배들에게는 늘 좋은 선배, 좋은 팀장님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피해를 봤을 수도 있겠네요. 위로도 아래로도.."
"연애할 때는 일정 시간이 지나고 제 불안이 올라오면 그만하자, 헤어지자, 먼저 이별통보를 했고, 주로 상대들에게 넌 너무 어렵다. 만족시켜 줄 수 없을 것 같다. 미안하다 는 말을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헤어지자, 지친다, 그만하자 했던 모든 말들이 제 자신에게 했던 말들인 것 같아요..."
[병원 가기 전]
전날, 밤새 두 시간 정도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아침 알림 울리기 전 벌떡 일어났다. 오전 6시 7분. 한 시간을 멍 때리다가 샤워를 하고 출근준비를 했다.
퉁퉁부어서 소시지 같은 두 눈덩이, 아래로 축 처진 입꼬리, 푸석해 보이는 피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화장을 하고, 소시지 같은 두 눈덩이를 어두운 쉐도우로 덮어버렸다.
대충 화장을 하고, 옷도 대충 입고 출근길에 올랐다.
환승역, 열차 문이 고장 나서 15분 지연이다. 기다리는 그 순간 심장이 쪼여오는 느낌이 들면서, 오늘 출근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리님, 나 오늘 출근이 어려울 것 같아요.. 아파... (울먹)"
창피하고, 이 무슨 무책임한 행동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뭐라 이 상황을 포장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출근을 못하겠다고 생각했고, 어딘가 아프다는 생각이었다.
혼자는 역부족이었다.
반복되는 소개팅, 연애와 이별, 회사에서의 사람관계, 잦은 이직, 끊임없이 올라오는 불안과 분노, 완벽주의 + 게으른 성향, 성공에 대한 욕망, 나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
그렇게 집에 왔다. 집에 오는 길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 있니?"
걱정 어린 아빠의 질문을 듣는 순간 눈물이 또 주르륵. 사실 딱히 어떤 일이 특정하게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마음상태는 왜 이렇게 꼬여버린 걸까 생각하면서 아빠에게 질문을 했다.
"아빠.. 아빠는 어떻게 나를 그렇게 무조건 적으로 사랑해?"
"무슨 그런 소릴 해~아빠 딸인데 당연한 거지~"
라고 말하는 아빠 말을 들으면서 아빠한테 이런 큰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왜 나는 이렇게 생각이 베베 꼬인 여성이 되었을까? 생각했다. 집에 와서 아빠와 1시간 통화를 했다. 15년 전, 나의 19살 유학시절에도 아빠는 국제전화 비용과 상관없이 내가 불안할까 노심초사하면서 매일 전화를 걸어 주셨다.
사업실패로 많이 힘들었던 당시, 가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아빠를 손가락질했다. 그 전화비로 차라리 생활비를.. 어쩌고.. 그들 관점에서 아빠를 비난했지만, 아빠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나'였다.
그 아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닫기까지 15년이 걸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성과주의, 계급주의, 자본주의에 빠지게 된 계기도 있었다. 17살 고등학교 때 필리핀으로 유학을 갔다. 유학생활 시절 내 또래 학생들 7명 + 어린 학생 두 명 정도와 함께 아버지 친구 집에서 하숙을 했다.
참으로 다양한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양한 지역에서 온 좀 사는 집, 못 사는 집이 섞여있었다. 나는 어느 쪽이었을까? 못 사는 집이었다. 생활비, 용돈, 가족들에게 오는 선물, 일 년에 한 번 방문하는 다른 학생들의 가족, 그리고 대화.. 이 모든 것들이 그땐 참 서글펐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듣게 된 이야기. 우리 집이 사업이 더 어려워져서 생활비를 못 보냈다는 말들. 다른 학생들도 같이 있던 그 상황에서 느꼈던 수치심, 모욕감, 원망, 부끄러움은 나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다.
지금은 생각한다. 그 상황에서 오죽했으면 그런 이야기를 하셨을까. 우리 부모님도 물론 잘못이 있을 것이다. 그냥 내가 그 대화를 듣게 된 게 너무 버거웠고, 그 집에 계속 살아야 한다는 사실과 다른 친구들의 이야깃거리로 내 이야기가 나오게 될 거라는 두려움.. 그 생각이 나를 더 위축되게 만들었고, 유학 전 천방지축 씩씩한 여고생이었던 나는 180도 변모했다. 완전히 소심소극적인 학생으로.
일 년에 한 번도 전화하지 않는 엄마. 당시에 우리 엄마는 내겐 너무 매정한 엄마였다.
지금은 이해한다. 먹고사는 게 너무 바빴고, 어린 남동생들이 두 명이나 있으니 엄마는 정말 죽을 맛이었을 거다. 엄마도 여자니까...라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당시엔 엄마는 역시 날 안사랑해! 라며 어떻게든 나 스스로를 불쌍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병원]
"지금은 누구랑 살아요?"
"혼자 살아요. 작년부터요. 9개월쯤 되었어요."
"그전에는요?"
"그전엔 엄마랑 살았어요. 같이 있을 땐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엄마랑 사이는 어때요?"
"엄마는 혼내실 때 늘 엄마가 원하는 게 뭔지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핀잔을 주셨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라가 아니라 네가 그렇지 뭐.. 방이 지저분하면, 방을 치워라가 아니라 어휴썅.. 집에 치우는 손가락 따로 있지. 엄마랑 모처럼 쇼핑을 가고 싶어서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면, 너는 눈치가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같은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33살이 돼서야 엄마가 하고자 하는 진심과 속뜻을 파악해야 하는구나 알게 되었다. 그전엔, 엄마의 말을 그대로 듣고 받아들여 나는 모자란사람이다 라는 생각과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자책하고 나에게서 문제를 찾는 습관부터 생기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고와 관점이 연애와 일에 그리고 모든 삶에 영역에 그대로 반영이 된다는 것이었다...
연애를 할 때도 늘 내 기준에서 우리의 관계가 무언가를 지향하지 않는다 생각이 들 때, 불안함을 느꼈고, 불만이나 고쳤으면 하는 점들을 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비난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상대는 혼난다는 느낌, 틀렸다는 느낌을 느꼈고 결국 그들은 두 손 두 발을 들고 피를 흘리며 나를 포기했다.
이렇게 관계가 끝나고 나면 나는 또 나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고통을 주는 나와 헤어졌으니 그들에겐 좋은 일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과연 옳은 생각일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주변에 이야기하면 단 한 사람도 그 상황을 납득하지 못한다. 외적으로 보이는 '나'와 내 안에 건강하게 성숙하지 못한 '나'가 잘 연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고, 책이나 강의를 통해서 공부도 많이 하셨고.... 더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일상으로]
오늘도 1차 상담을 마무리하고, 불안감이 느껴질 때 먹는 약을 하나 먹고 집을 정리하던 중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뭐 좀 먹었어? 저녁 먹을까?"
"약을 먹어서 컨디션이 좀.."
"어휴 너는 또 왜 그런델 가서"
"..... 엄마 나는 노력하는 거야"
엄마의 마음은 잘 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다 하는 내가 불효녀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생활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변수들을 유연하게 대처하고, 사람들과의 의견 충돌을 잘 풀어가고... 하나씩 해결하기 위해서는 엄마, 아빠와의 소통 방식도 개선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차분히 전달하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오늘은 나에게 치료를 시작했으니, 앞으로 나에게 생길 변화를 기대해 본다. 그냥 의사 선생님이 하란대로 하려고 한다. 단순하게.
두서없이 정리한 글이지만, 누군가는 공감받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에서 불안, 공포, 분노등의 감정으로 힘든 순간을 이겨내고 계실 모든 분들과 함께 오늘 이 순간을 오롯이 살아가는 행복을 느끼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