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났지만 거리는 쌀쌀했다. 카페에 들어가니 그제야 봄 같았다. 토요일 오후의 브런치는 결혼하고 처음이었다. 하얀 벽돌로 둘러싸인 주방 위로 커다란 등 세 개가 달려있었다. 빛바랜 청색 등이 노출 천장 아래서 은은히 빛났다. 1년 만에 J를 만났다. 나와 J 모두 교회를 옮긴 후, ‘언제 만날까?’ 약속을 잡다가 계절이 두 번 지났다. 우리는 카페 가운데 놓인 긴 나무 탁자에 앉았다. 클래식 브레키와 수플레 팬케이크, 아메리카노와 레몬티가 나왔다. 집에서도 먹는 달걀프라이와 소시지가 멋스러웠다. 포슬포슬 팬케이크 위에 생크림이 가득했고, 슈가 파우더 맞은 딸기는 예뻤다.
J는 여전히 하얗고 어렸다. 살짝만 웃어도 온 얼굴에 미소가 퍼지는 타고난 동안. J 옆에 있으면 나는 어쩐지 촌스러웠다. 턱에는 뾰루지가 나고, BB크림 바른 얼굴은 어색하게 하얬다. 화장을 안 하면 주위에서 “어디 아파요?” 오해할 만큼 나는 화장한 얼굴과 민낯의 편차가 크다. 함께 나온 J의 남편도 그대로였다. ‘이 부부는 나이를 거꾸로 먹나.’ 신기한 듯 인사를 건넸다. “오빠는 결혼할 때랑 똑같아요. 여전히 생기가 넘쳐요.” 오랜만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은 건 지난날 덕분이다.
대화가 무르익자, 내가 말했다. “우리 MBTI 검사했을 때, 완전 반대로 나왔던 거 알아? 검사 결과는 잊었는데 너랑 모두 달랐던 건 기억나.” MBTI는 극과 극인 두 가지 성격 중 하나 고르는 방식으로, 심리 유형을 16개로 나눈다. 언젠가 교회에서 MBTI 검사를 했는데, 나와 J는 겹치는 게 없었다. 내가 외향형(E)이면 J는 반대인 내향형(I). 감각(S)과 직관(N), 사고(T)와 감정(F), 판단(P)과 인식(J) 중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날 문득 생각했다. ‘나는 J와 너무 달라서 그렇게 끌렸던 걸까.’
“난 예전부터 네가 부러웠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J는 어렸을 때부터 쉽게 얻은 게 많다고 했다. 대부분 어렵지 않게 배웠고,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애쓰지 않아도 친구가 생겼단다. 내가 말을 이었다. “난 친구 만드는 게 숙제였어. 초등학교 1학년 때 겨우 친구를 사귀었는데, 구미로 간대서 따라가고 싶었어.” 추억이 된 이야기지만, 그때는 세상이 반쯤 무너진 듯했다. 내가 말했다. “같은 옷을 입어도 J 네가 입으면 달랐어.” J가 알려준 사이트를 한참 뒤적여 옷을 사도, 막상 입으면 J의 느낌이 안 났다. J의 추천이라면 따지지 않고 화장품도 사고, 음식점도 갔던 걸 알고 J는 알고 있을까.
J는 늘 무언가를 배웠다. 가구 리폼, 가죽공예, 바리스타 등 나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 여유와 재능이 탐났다. J의 답은 의외였다. “난 내가 잘하는 걸 찾고 있어. 정체성을 찾는 중이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주위에서 나를 보며 좋겠다고하는데 아니야. 아직 뚜렷한 나의 길을 못 찾았어.” 나도 얼마 전까지 ‘나’를 잘 몰랐다. 나는 회사원보다 프리랜서에 더 잘 맞다.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이기보다 자유롭게 내 색깔을 드러내는 게 좋다. 어렸을 때 누군가 지금의 나처럼 사는 방법도 있다고 알려줬다면 어땠을까. 나를 규격화하려고 그렇게 애쓰지 않았겠지. 지금의‘나’를 만나기까지 꽤 많이 돌아왔다.
J가 말했다. “넌 늘 열심히 사는 느낌이었어. 가끔은 그게 안쓰럽다고 할까? 인생이 노력한 대로 되는 게 아닌데, 항상 힘쓰며 살더라고….” 나는 열심히 뛰는 법밖에 몰랐다. 놀 때도 계획적으로 정성을 다했다. 여유는 게으름을 포장한 말이라 여겼다. 어느 날, ‘왜 그렇게 애쓰며 사니?’ 질문에 쿵 부딪혔다. ‘사랑받고 싶어서….’ 별 다른 이유가 없었다. 수고한 만큼 내 인생이 달라지길 바랐다. 나도 J처럼 주목받고 싶은데, 내가 배운 유일한 삶의 방식은 ‘최선’뿐이었다. ‘지성이면 감천.’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이런 어른들의 동화는 언제까지 유효할까.
“우리 뭔가 비슷하다.” 나와 J의 결혼 생활은 닮은 점이 꽤 많았다. 나는 결혼 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났다. 형편없이 무너진 나를 ‘지금 화가 났구나’, ‘그래, 속이 터질 거야’ 안아주었다. 그제야 남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 J도 가끔 흔들리고 넘어졌다. 그렇게 자신을 찾아갈 것이다. 우리 사이의 모든 말들이 따뜻했다.
이웃을 그냥 사랑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걸세.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남을 사랑할 수는 없어. 그런 의미를 포함한 말이라고 생각하게. 자네가 “타인을 믿을 수 없다”고 호소하는 것은 자네가 스스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네.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2》, 228쪽
하늘 한가운데 있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엄마, 언제 와?” 휴대전화 너머로 둘째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할 이야기가 태산인데,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실컷 수다를 떨고 “집에 가서 전화할게”라며 헤어지는 아줌마 마음, 느릿느릿 카페를 나왔다. 햇살이 사라진 거리, 바람이우리를 감쌌다. “1년 뒤에 또 만나.” 마음을 담아 말했다. “그래, 1년 뒤에 봐.” J가 웃으며 답했다. 그날의 대화는 또 무엇으로 채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