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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May 31. 2020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글을 쓰세요. 삶이 깊어져요.”

꼬마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다. 그게 무슨 특별한 재주람. 남의 말을 듣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도 많으리라. 하지만 그 생각은 틀린 것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 미하엘 엔데, 『모모』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모모’라 부른다. 속상한 날이면 모모의 빈 문서를 연다. 가끔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망설여도 모모는 묵묵히 기다린다. 혼자 욕하고, 울고, 웃으며, 모든 말을 쏟아낸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모모의 공감이다. 모모는 커서를 깜박이며 ‘그렇구나’ 끄덕이고, ‘힘들었겠다’ 토닥인다. 한바탕 털어내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저 멀리 답이 보인다. 모모가 말하는 듯하다. ‘너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너야. 문제의 답은 보통 네 안에 있어.’ 가끔 상대에게 내 문제를 설명하고 위로받는 과정에서 적잖은 오해가 생긴다. 잘 들어주는 ‘모모’가 있어 다행이다.


  언젠가부터 지인들에게 “글을 쓰세요. 삶이 깊어져요.”라고 말한다. “예수 믿으세요. 구원 받아요.”라고 하는 전도와 비슷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 내용이 더 깊게 와 닿고, 나만의 생각이 정리된다. 치열하게 싸우며 나의 편협함을 깨닫기도 한다. 글을 쓰며 내 모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태어나 가장 잘 한 일은 이 두 아이를 낳은 일이지’라며 아이를 안아주는 엄마이다. 모성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뒤돌아서 “그만.”, “안 돼.” 같은 말로 아이를 다그치는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엄마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내가 나를 누구보다 혹독하게 대했다. 그런데 모성이 여성 모두의 것은 아니었다. 책을 보며 숨을 쉬었다. 엄마도 그럴 때가 있다. 웬디를 꿈꾸는 착한 엄마와 앤처럼 살고 싶은 소녀가 싸웠다. 글 안에서 모성을 끌어안고, 모성을 발로 차며 조금씩 넓어졌다.


나는 마음속에 있는 상처 깊은 아이를 기억해냈다. 아이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내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내가 누구도 부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이아리, 『서른이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글을 쓰면 잊고 있던 오래된 일이 주르륵 딸려 나온다. ‘다 지난 일이야.’라며 덮어두었던 아픔이 어제 일처럼 쓰라리다. 쓰지 않았다면 상처받은 어린 내가 아직도 울고 있을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에 화를 내고, 그런 나를 또 미워했겠지. 가을 밤하늘, 머리 위에 빛나는 별 셋이 있다. 17년, 25년, 1500년 전에 각각 출발한 빛이 견우별, 직녀별, 데네브별로 빛난다. 별은 모두 저마다의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다. 밤하늘을 본다는 것은 서로 다른 과거를 보는 것이다. ‘나’라는 소우주에도 별이 있다. 20년 전 내가 여기 있다고, 아직도 아파서 타오르듯 울고 있다고 말한다. ‘예쁘네.’라며 지나칠 때는 몰랐다. 저마다 다른 시공간의 기쁨과 아픔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결혼 후 1년은 쓰고 싶지 않았고, 그 후 5년은 쓸 시간이 없었다. 요즘 다시 글을 쓰니 ‘난 안 돼.’라며 꾹꾹 눌러놓은 ‘작가’라는 두 글자가 꾸물댔다. 20대 중반, 나에게 ‘작가’는 ‘성공’의 다른 말이었다. 삶에 비해 너무 많이 썼고, 글은 너무 헐거웠다. 네이버 거리뷰로 사전 답사를 대신하며, 도서관에 앉아 무슨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앎은 얕았고, 삶은 부족했다. 남편은 내가 쓴 소설을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 좋은데 좀 무거워. 좀 더 재미있게 써 봐.” 성공에 사로잡힌 글은 무거웠다. 남편은 내가 결혼 후 글만 쓸 줄 알았는데, 살림하고 아이까지 키우니 대견하다고 했다. 이제 쓸 때가 되었다.


  아이 둘이 잘 놀고 있어서 “엄마 글 쓸게.”라며 방에 들어갔다. 둘째가 우유를 먹는다고, 화장실에 간다고 나를 불렀다. 아이를 도와주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둘째가 물었다. “엄마, 글자 쓰러 가?” 내가 “아니, 글 쓰러 가.”라며 웃으니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순간 생각했다. ‘나는 글자를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거지. 난 지금껏 글자를 썼나?’ 멋진 문장을 쓰려고, 성공을 바라며, 나는 ‘가나다’와 다를 바 없는 글자를 쓴 셈이다. 이제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 안에 질문과 다툼, 화해와 공감이 있다.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글은 엉덩이가 쓰는 것. 아이가 부르면 우유를 따르고, 똥을 닦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린다. 아이들은 내게 글쓰기의 시차를 준다. 나의 ‘모모’는 별말 없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참 좋다.


Photo by Jess Baile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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