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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May 31. 2020

다만 오늘 여기

첫째 돌 사진 속 나를 보면, 불과 몇 년 전인데 참 어리다

어제 거기가 아니고 / 내일 저기도 아니고

다만 오늘 여기 / 그리고 당신. - 나태주, 『행복』


  남편이 무슨 선물을 받고 싶은지 물으면, 망설임 없이 ‘시간’이라 답했다. 하루 종일 먹이고 씻기고 치우고, 두세 시간마다 일어나 밤중 수유를 하던 때가 있었다.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하는데,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내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고군분투할수록 더 지쳤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펼쳤다가 온종일 피곤함과 씨름한 적도 있다. 두 아이는 내 시간을 먹고 자랐다. 첫째 돌 사진 속 나를 보면, 불과 몇 년 전인데 참 어리다. 내가 나이 든 만큼 아이는 자랐다.


  결혼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나와는 먼 이야기였다. 내 성공과 명예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한 번도 생각지 못 한 말이 아이의 입에서 나올 때면, ‘삶은 여기 있구나.’ 깨닫는다. 모처럼 미세 먼지가 없는 날 유치원을 다녀온 둘째에게 물었다. “은산아, 오늘 밖에 나가서 신나게 놀았어?” 둘째가 고개를 저었다. “음, 오늘 미세 먼지도 없었는데 왜 안 나갔어?” 둘째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구름이 너무 낡아서 못 나갔어.” ‘네가 있어 낡은 구름을 보는구나.’ 생각했다. 늘 거기 있던 시간, 저기 있을 시간만 쫓으며 살았던 나에게 아이가 말한다. 여기를 보라고, 여기 행복이 있다고 말이다.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에 봄과 가을을 두고 망설였다. 덥고 추운 여름과 겨울보다 봄과 가을이 더 좋았지만 그 차이를 몰랐다. 이제 보인다. 봄은 여름보다 겨울을 더 닮았다. 봄 공기는 건조하고, 추위는 시샘하듯 매서웠다. 시린 겨울 끝에 꽃을 피운 매화와 벚꽃은 피어있는 내내 흔들렸다. 꽃잎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내 인생의 봄도 그랬다. ‘나’라는 우주 안에 푸릇한 싹이 겨우 고개를 들었지만, 흔들리고 아팠다. 연둣빛 산이 더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 가던 늦은 봄, 나는 생소한 별을 만났다. 내 부모의 우주가 우리 은하에 있는 별이라면, 남편은 저 멀리 보이는 데네브별이었다. 1500광년 떨어진 데네브별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두 개의 별이 우리를 찾아 왔다. 여름의 시작이었다. 뜨겁고 목이 말랐다. 하지만 이제 안다. 이 더운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는 것을.


  나는 지난 몇 달 ‘오늘 여기’를 살지 못 했다. 책 한 권을 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버려야 하는 글도 많았고, 그만큼 새로 써야 했다. 글은 무척 더디게 좋아졌다. 나는 틈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둘째가 자신도 글을 쓰겠다고 내 무릎에 올라오자 첫째가 “은산아, 누나랑 비눗방울 놀이하자.”라며 밖으로 나갔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둘째가 “엄마, 선물 할 게 있어.”라며 나를 불렀다. 귀찮은 마음에 “이따 볼게.”라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데, 아이가 계속 문을 두드렸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아이 손에 붉은 하트 모양 낙엽이 들려 있었다. “엄마를 사랑해서.”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 가을이 왔구나.’


  태어나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 하지만 나는 늘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무언가 해야 한다고, 여기서 내 인생이 끝나서는 안 된다고. 마치 빠르게 질주하는 말을 탄 듯 세상은 어지러웠다. 두 아이 덕분에 말에서 내렸다. 무심코 지나친 잡초가 피운 꽃을 이제 본다. ‘오늘 여기’의 삶이 나쁘지 않다. 요즘 내 감정을 살피는 두 아이를 보면 ‘많이 컸구나.’ 생각이 든다. “지금이 좋을 때야.”라는 어른들 말이 문득 내 것 같다. 이제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남은 가을을 보러 가야겠다.


Photo by James McGil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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