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물었다. “선생님 몇 살이에요?” “응, 백 살.”이라고 답하니 한 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선생님들은 맨날 그래. 천 살이라고 그러고, 집은 우주.” 순간 뒷목이 당겼다. 나부터도, 교사들은 사생활 공개를 꺼린다. 그게 뭐라고 지금껏 그리 꽁꽁 숨겨 왔을까. 다음엔 제대로 답해야지 생각했다. 얼마 뒤, ‘100 인생 그림책’을 읽었다. 인생을 0세부터 100세까지 따라가며 살펴보는 그림책이었다.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선생님 몇 살이에요?” 물었다. 나는 “응, 서른여섯 살.” 답했다. 대부분 별 관심이 없었고, 한 아이는 “우리 엄마는 마흔인데….”라고말했고, 한 아이는 “동안이네요.”라며 칭찬을 해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왜 그렇게 내 나이를 숨겨왔는지 의아했다. 우주에 사는 백 살 선생님에서 중리에 사는 서른여섯 선생님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나는 일부러 아이들 앞에서 미숙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한다. “엄마랑 아빠랑 싸워서 누구랑 살 건지 고르라고 할 때 정말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어.”, “왕따 당해서 점심 혼자 먹었던 적도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가 나를 바라본다. ‘완벽한 교사’는 사실 교사만의 바람 아닐까. 아이들조차 그런 선생님을 원하지 않는다. 가끔 실수하고 부족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 속에서 아이들은 ‘사람’을 배울 것이다. 가르치는 자리에서 내려올 때, 관계는 여문다. 서툰 모습 그대로, 어른도 가끔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용기가 필요하다.
어린아이와 놀아주거나, 십대들과 함께 일하거나,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노인들과 인간적인 접촉을 할 기회가 거의 없다. 이처럼 교육을 목적으로 분리된 젊은이들은 인생이라는 교육 현장을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 헨리 나우웬, 월터 개프니, 《나이 든다는 것》, 147쪽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 삶에서 자신은 사라졌다. 하루 종일 집을 지키는 사람, 가끔 다른 이의 삶에 끼어들어 참견을 하는 이가 되었다. “하루가 참 길다.”라며, 여름은 겨울처럼, 겨울을 여름처럼 지냈다. 누군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택배를 받고,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가늠해보는 아주 지루한 시간들. 할머니가 점점 기억을 잃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할머니를 보면 나이 드는 건 참 서러운 일 같았다. 추억이 사라지고, 틀니조차 불편해 밥을 못 하고, 뼈마디가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늙음.
‘늙다’와 ‘젊다’는 반대말이지만, ‘늙다’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이다. ‘젊음’은 한 순간의 상태인데 반해, ‘늙음’은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다. 내 인생에서도 ‘젊음’이라는 형용사는 사라지고, ‘늙음’이라는 동사는 계속된다. 20대의 싱그러움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늙음’과 함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르치기 보다는 귀 기울여 듣고, 한 걸음 떨어져 ‘나’와 다른 이를 다독여야지. 기쁨을 찾아 나서며, 가끔 실수해도 괜찮다 해주어야지. 나이 든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